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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Feb 20. 2021

소소한 요령들

비염약과 유자청




유독 코가 막혔다. 비염인지 코감기인지 모르겠지만 콧물이 줄줄 샜다. 훌쩍이느라 힘이 다 빠져서 몽롱한 기분이 들면서 어쩐지 차분한 마음마저 들었다. 따듯한 걸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엌에 물을 올려두고 나서야 유자청 뚜껑이 열려있는 것을 알았다. 유자청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채로 살짝 말라있었다. 애매한 양이라 남은 유자청을 다 털어서 넉넉히 물을 넣고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한모금 하니 그래도 유자 맛이 조금 나면서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내일은 유자청을 새로 사다놔야겠다.


답답한 잡생각들이 많이 드는 하루였다. 나는 조금 여유로운 걸 좋아하고 아둥바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일종의 쿨병 같은 게 있는데, 그런 태도가 조금은 자기합리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기간이 다가오면서 주변 사람들의 달라진 태도를 자주 보게되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이런 잡념 사이에서, 내가 다시 나를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심도 들었다. 원하는 것에 대한 불신. 답답한 잡념.


스스로를 오해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인줄 알았다가 잔뜩 데이고 나온 경험들이 있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랬고 상황에 대해서도 그랬다. 충동구매한 물건들처럼, 내가 나를 잘 몰라서 충동적으로 벌인 일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뭔가 구미가 당기는 일들이 생기면 조금 관조하는 버릇이 생겼다. 여전히 사람하고 음식한테는 별 수 없지만 말이다. 거기다 충동구매도 여전하고, 언제나처럼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예전에 티비에서 이런 생각들이 들면 머릿 속에 쓰레기통을 상상해서 생각들을 종이처럼 구겨서 버리라는 팁을 본 것이 생각나서, 그렇게 하고는 불까지 질러버렸다. 활활 타는 상상을 하니까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머리를 자르러 다녀왔다. 사실 예약해놓고 저런 생각들을 하느라 까맣게 잊고있었는데 OO이가 마침 얘기를 꺼낸 덕에 기억나서 다행히 늦지않게 다녀왔다. 머리를 자르고 오니까 태워버린 생각들이 훨씬 정리가 잘되서 마음이 개운해졌다. 자기 삶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느만, 적당히 믿고 사는게 하루하루 사는데 좋아보인다. 


코가 계속 막혀서 집에 있던 약을 꺼내 먹었다. 잡념종이를 불태우는 상상이나 머리를 자르는 일이나 삶에 적당한 확신처럼, 비염약 같은 삶의 요령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유자청이 살짝 말라버렸을 땐 물을 넉넉히 넣어서 타 먹으면 괜찮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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