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에서 5월, 웹툰 기획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인생의 플랜 B를 웹툰 작가로 정했기 때문이다. 웹툰은 10조원 시장을 앞두고 호황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말마따나 물들어오는 때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을 노는 물론이고 조각배도 없었다. 그렇다고 물가를 떠나지도 못했다. 일단은 손이라도 적셔 보고 싶었다. 4회 정도에 불과한 아주 기초적인 과정이었지만 강사가 유명한 모 대형 플랫폼의 전직 이사였기에 이거다 싶어 신청했다.
모임 당일, 뜻이 비슷한 사람이 나까지 네 명 모였다. 비슷한 건 뜻뿐이었고 실력은 그렇지가 못했다. L씨는 애니메이션 전공자이고, K씨는 웹툰을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수출하는 회사에 다니는데다 최근에 그림을 전문으로 배운 적이 있었다. 붙임성 좋은 H씨는 전직 웹디자이너였던지라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들 사이에서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그저 내가 대단히 열성적인 소비자라는 점, 그리고 아주 예전이긴 해도 연재를 경험한 적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참 하찮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건 아니었지만.
씽큐베이션과 과제 마감일이 겹쳐 어느 한쪽에 올인을 하지 못했다. 책은 책대로 느리게 읽고, 웹툰 기획에 필요한 아이디어도 떠올리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큰 욕심 내지 말고 감이나 잡자는 생각으로 매주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과제를 내는 것에만 의의를 두었다. 강의는 딱 내가 생각한 대로의 성과물만을 낸 채 여차저차 끝이 났다. 그리고는 ‘좋은 경험’으로 남겨둔 채 잠시 잊고 지냈다. 그런데 <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을 읽고 있자니 자꾸만 그 때가 떠오른다.
영미판이 예쁘다
<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은 크리에이터와 창의성에 관한 얘기를 풀어낸 책이다. 저자 앨런 가넷이 밝혀낸 창의성의 비밀 중 핵심은 ‘크리에이티브 커브’이다. 어떤 것을 창작해내기 전에는 그저 열렬한 소비자였다가 어느 순간부터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기 시작하는 크리에이터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리고 소비와 연습을 거쳐 쓸 만한 걸 생산해 내고, 창의력이 샘솟는 구간이 바로 ‘스위트 스폿’이다. 이러한 여정이 비단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누구라도 이 커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했다. 바로 연습을 통해서 말이다.
Creative Curve
덕후가 돼라
먼저 소비를 해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흠뻑 빠져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웹툰 기획 강의를 한 선생님도 한 플랫폼의 이사이기 전에 대단한 만화 덕후였다. 심지어 지금까지 열혈 소비자의 입장에서 원하는 콘텐츠를 찾으러 다닌다고 하셨다. 팔릴 만한 작품을 알아보는 감을 유지하려면 계속해서 소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에서는 소비가 크리에이티브 커브의 ‘친숙성’의 정도를 확인하는 일이라고 했다. 웹툰 작가가 되고 싶으면 웹툰을 많이 보고, 작곡가가 되고 싶으면 음악을 많이 들어야 한다는데 너무 당연한 얘기 아닌가. 창의성은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내 머리 맡에 놓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양의 콘텐츠를 소비해야 창작에 필요한 연료를 채워 넣을 수 있다.
따라쟁이가 돼라
앨런 가넷은 ‘새로움’을 더하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이 ‘모방’이라고 말했다. 새로움과 모방이라고 하면 서로 모순되는 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모방의 의미를 좀 더 정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모방은 잘 팔리고 인기가 많은 작품의 ‘패턴’을 파악하고 학습하는 과정이다. 웹툰 강의에서는 담당자가 기획서를 읽는 것만으로 영화화를 결정지은 한 작품과 그것의 기획서를 예시로 보여 주었다. 또 연출이 매력적인 작품들을 예시로 들어주었고, 돈을 벌기 위한 웹툰이 최소 몇 컷이어야 한다는 것까지 모두 알려주었다. 책에서는 신데렐라 이야기 패턴을 예로 잘 들어주었다. 나는 진짜 새로운 걸 할 거고 모방 따위는 필요 없다고? 다시 말하지만 친숙성은 정말 중요하다. 친숙성의 정점에서 자기만의 색다름을 덧붙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천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라는 그렇게 기억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트렌드’를 잘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면 많이 소비하고, 패턴을 따르면 그걸로 인기를 끌 수 있는 걸까? 안타깝지만 또 아니다.
익숙함과 낯섦이 조화를 잘 이뤘다고 말하고 있다
같이 해라
창의적 공동체가 필요하다. 창작은 팀 스포츠에 가깝다고 한다. 앨런 가넷은 ‘창의적이려면 부대껴야 한다.’라고 했다.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지식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살롱’ 문화가 점점 대두되고 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여 글을 쓰고, 가사 쓰고 싶은 사람들이 같이 모여 가사를 쓴다. 돈을 내고 배운다는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해당 영역의 전문가인 리더 혹은 파트너를 중심으로 자유롭게 모이는 것이다. 같이 나아가는 힘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것이 하나의 현상으로 불거진 것이다. 씽큐베이션도 그렇다. 성장욕구가 있는 사람이 모여 ‘잘 팔리는 글쓰기’라는 주제로서평을 쓰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성장을 불러 왔을 것이다. (나의 성장은 미미했지만...)
웹툰 강의가 어쩌다 보니 4명이 되어 작은 모임처럼 구성됐고, 모든 사람이 전문 영역에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잘된 일이다. 여기서 말한 마스터 티처, 상충하는 협업자, 모던 뮤즈, 유명 프로모터의 조건이 어느 정도 맞기도 하다. 전직 이사는 마스터 티처이자 유명 프로모터일 테고, 상충하는 협업자는 같은 멤버들이 될 테니까 말이다. 성장하려면 앞서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라고 했는데, 그들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 마지막 수업 날에는 시놉시스를 합평했고, 다음 주 토요일에는 1화의 스토리보드를 가지고 모이기로 했다.
졸꾸 해라
마지막은 뭘까? 반복, 또 반복. 졸라 꾸준하게 반복하는 거다. (JOLGGU!) 책에서 설명하는 내용 중에는 개념화와 압축의 단계가 있다. 일단 브레인스토밍을 해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생각해내고, 그중에서 필요한 내용을 골라 압축하는 것이다. 웹툰 수업도 그렇게 했다. 할 수 있든 없든 간에 주어진 세 가지 범주 안에서 소재를 최대한 많이 끄집어내고, 거기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다시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믿을 수 있는 소수에게 보이고 반응을 보이는 큐레이션 단계도 반복 과정에서 필수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피드백을 얻어야 한다. 시간이 계속 흐르기 때문에 창작자는 끊임없이 대중을 살피고 피드백을 받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할까? 선생님은 웹툰을 인스타나 페이스북에 올리고 피드백을 받으라고 했다. 심지어 웹툰 에이전시가 작가 발굴을 위해 매일 살피고 있는 곳이 바로 SNS이다. 꾸준히 올리다 보면 언젠가는 연락이 온다는 것이다.
참 이상하다. 세상은 어느 정도 패턴으로 이뤄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 책에서 하는 얘기가 마케팅 책에서도 나오고, 웹툰 교실에서 한 얘기는 신박사님이 하신 얘기랑도 통한다. 이제야 조금씩 패턴을 알게 된 걸 보면 나는 너무 늦게 어른이 된 것 같다. 곧 할머니를 앞둔 이 나이에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모두 통하는 걸 보니 천재성의 비밀을 밝혀낸 이 책이 영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다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16,000원을 끄집어내기 위해 너무나 당연한 말들로 그럴 듯한 여지를 남겨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너는 못해’가 아니라 ‘너도 할 수 있어’라니 영 싫지만은 않다. 이 책에 나온 프랭클린의 연습법대로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를 매주 한 편씩 모작하고, 김영하의 글을 필사하려고 한다. 그리고 2020년에는 데뷔를 해야겠다. (...12월로 하자..!)
* 창의성에 관한 낭설과 진실
º 창의력이 ‘번뜩인다’?
우뇌가 낸 답이기 때문이다. 좌뇌는 주로 의식적인 노력을 할 때 활성화된다. 물론 우뇌도 활동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인지할 수 없다. 좌뇌가 답을 내지 못하면, 그제야 우뇌가 낸 답을 알아채게 되는 것이다. 아하!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