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읽고 쓴다

죽음에 관하여

by 누가

1. 고작 여섯 자의 몸


둘째 작은 아버지가 2년간 간암을 앓으시다 올해 5월에 돌아가셨다. 부고를 들었을 때 슬퍼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예상하고 있던 죽음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삼사 개월 전에, 어느 정도 두려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래, 나아야지.’라고 하셨던 것만 기억났다. 그렇게 아직 살아계신 것 같았다. 그리고는 관심이 지극히 내 편의에 관한 쪽으로 옮겨갔다. 포천은 너무 멀다, 하지만 당일에 돌아오려면 반차를 쓰고 지금 당장 다녀와야 한다, 내 휴가 사용 상황을 보건대 반차 쓰기가 참 부담스럽다는 생각 따위를 했다. 고속버스에 올라서도 듣고 있는 노래나 날씨가 좋다는 생각이나 하다가 꾸벅꾸벅 졸며 갔다.


장례식장에는 가족들뿐이었다. 둘째 작은아버지는 한국에 친구와 동료가 별로 없다. 회사에서 막 대리를 달았을 때쯤 미국으로 가버리셨기 때문이다. 썰렁한 장례식장을 지키며 두어 시간 쯤 기다리다 보니 포천에 있는 첫째 작은 아버지의 회사에서 조문객들이 찾아왔다. 사장부터 막내 사원까지 모두 모여 회식이라도 하러 온 것 같았다. 사장 옆에 앉아 재미도 없는 얘기에 하하 호호 웃어주고 있었다. 고인의 가족들이 하면 될 음식 나르기 같은 일을 자기가 팔 걷어붙이고 하려는 건 왜 그러는 건지 알기 너무 쉬웠다. 일하는 아주머니는 아주머니대로 요청한 적도 없는 잔반 재활용을 하고 있었다. 그러지 마시라고 한 마디 하고 나서야 한 쪽에 곱게 치워둔 반찬들이 사라졌다. 산 사람은 사는 문제로 분주했다. 조의금을 내고 시간을 내어 왔으니 여기서 필요한 걸 얻어 나가려고 했다.


종교인이라고 다를까. 조금 뒤에는 교회 사람들이 한 스무 명 와서는 기도를 했다. 둘째 작은 아버지를 간호하던 작은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좋은 데 가시라는 그런 기도였겠지만 저 중에 진심을 담아 기도하는 사람이 한 명이나 있을까 싶었다. 생전에 한 번이라도 잘해준 적은 있는 사람들인 걸까? 그저 산 사람으로서 산 사람에게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남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슬프고 위로 받았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었다.


장례식장은 조금이라도 더 잘 살아보려는 산 사람들의 육개장 냄새나는 입김으로 가득했다. 죽은 사람은 여섯 자밖에 되지 않는 관에 갇혀 누워 있었고, 넓은 공간과 맛있는 음식, 선선한 바깥바람은 모두 산 사람들만 누리고 있었다. 화장한 뒤에는 여섯 자도 안 되는 곳으로 옮겨졌다. 유골함을 안치한 곳은 고작해야 고등학생 때 쓰던 사물함 한 칸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제야 눈물이 좀 났다. 잘 살아 보려고 그 너른 땅으로 가셨는데 마지막에 돌아온 곳은 미국이 다 뭐란 말인가. 생전에 앉던 의자보다 작았다.





2. 고양이를 부탁해


‘우리 집 현관 비번 0000이야. 나 죽으면 우리 수지 좀 데려가서 키워줘.’

동생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알았으니 잘 다녀오라는 답장을 받으면 그제야 짧은 여행 준비가 끝난다. 그밖에 별로 부탁할 것은 없다. 어디 멀리 가는 것은 아니지만, 운이 좋지 않으면 외출이 길어질지도 모른다. 수지가 나를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나에게 보내는 다정한 인사다. 나는 신발을 신으려다 말고 다시 들어가 작고 촉촉한 코에 내 코를 부딪는다. “다녀올게.” 수지는 올해 다섯 살인 고양이다.


얼마 전에 수지가 아팠다. 상자 모양의 작은 천막에 들어가 맥없이 누워 있는가 하면 몸살이 심하게 든 사람처럼 물 한 모금 마시러 갈 때도 자세가 편치 않았다. 좋아하는 간식을 내밀어도 다가오려 하지 않고, 부르면 느리게 시선으로 답할 뿐이었다. 밥과 물을 찾는 횟수가 적어졌다. 대소변의 양도 급격히 줄었다. 사냥놀이에도 관심이 없었다. 숨이 꼴깍 넘어갈 만큼 병원을 싫어하는 아이지만 호불호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고, 털을 뿜고, 침을 흘린다. 심할 땐 오줌을 지린다.) 동네에는 믿을만한 병원이 한 군데도 없었다. 택시를 타고 신촌에 있는 2차 동물 병원으로 향했다.


피검사와 초음파와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염증 수치가 높게 나왔고, 백혈구 감소량이 비정상적이었으며, 열이 40도까지 올라 있었다. 초음파로는 이상 소견이라 할 만한 게 발견되지 않았다. 장이나 신장은 오히려 여느 고양이들보다 상태가 좋았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로 보아 대퇴골 쪽에 염증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온 몸의 기가 쇠할만한 건 아니라고 했다. 의사는 대학교 전공서적에 나왔을 법한 어려운 말로 뭐라 길게 설명한 후, 백혈병 검사를 받아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백혈병도 아니라면 복막염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얼마가 들든 일단은 오케이였다. 고양이 복막염은 불치병이다. 예방약도 치료약도 없다. 일단 걸리면 1년이 안되어 죽고 만다. 검사가 좀 더 길어졌고 머릿속이 복잡해져 왔다.


뺨을 긁어 줄 때마다 고롱고롱 거리며 머리를 더 기대어 오는 정 많은 내 고양이. 너처럼 착하고 예쁜 아이가 그런 무서운 병을 앓다 가지 않길. 끝이 있는 것들끼리 영원히 같이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수지가 제 수명을 다 살고 내가 곁에 있을 때 평온한 상태로 무지개다리를 건너길 바랐다. 이건 너무 밑도 끝도 없잖은가. 수명을 나눠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어린애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잘못한 게 있다면 전부 내 잘못일 텐데 왜 네가 아플까. 두 집 건너 살던 남자가 입대하며 너를 키우겠냐고 했을 때 덜컥 맡지 말 걸. 그 집 청소한다고 열어둔 문으로 몰래 외출한 너를 복도에서 만나지 말 걸. 나의 잘못을 더듬어 보고 처음 만났던 때를 부정해 보기도 했다. 내가 했던 아주 사소했던 잘못들까지 모두 떠올라 미안했다. 내가 그 앨 행복하게 해 주었는가를 돌이켜 따져보았다. 책 몇 장 더 읽겠다고 등지고 있었던 시간 내내 뒤에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말로 그 아이가 떠나게 된다면 난 회사를 관두고 그 애에게 남은 시간 모두를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바뀌는 것은 없었다. 검사 결과라는 팩트만 중요할 뿐이었다.


검사 결과가 명확치 않아 추가 검사를 해가며 한 달 정도를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히 모든 게 헛소동이었다. 수지가 힘을 내주었다. 고맙고 기특했다. 죽고 사는 것의 경계에 있다가 단숨에 삶을 향해 뛰어나와 내 품에 안겨든 것 같았다. (겨우 고양이의 죽음을 논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가족이고 자식이다.) 5킬로그램도 안 되는 고양이라고 해서 죽음의 무게까지 가볍진 않다. 내가 사는 의미는 이 애가 모두 지고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에게 맛있는 걸 사주려고 매일 출근한다. 나는 지금 멋대로 죽어버리거나 벌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두운 때가 돼서야 빛이 소중한 줄 아는 것처럼, 죽음을 직면했을 때에야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에 관해 매일같이 생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죽음을 되새기는 것은 삶의 어두운 구석에 대해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닫는 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이 삶을 훨씬 더 달콤하게 해준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사랑하는 이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순간엔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다. 그땐 눈앞이 캄캄해지고 그저 ”제발, 제발“이라는 말 외엔 어떠한 명구나 기도문도 떠오르지 않는다. (책 속에서)





3. Memento mori


샐리 티스테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죽음에 대한 개인적 감상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을 좇아가며 죽음을 맞이하는 올바른 태도를 소개한다.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드라마처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죽음에 당사자 혹은 보호자로서 결정해야 할 것들을 알려준다. 임종 과정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해나갈 권리를 인정해야 하며, 내 죽음이 오로지 내 소관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참에 나의 ‘적합한 죽음’에 대해 몇 가지 결정해 두려고 한다.


샐리 티스테일은 그렇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보아왔지만, 단언컨대 나는 끝까지 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죽음이 예정된 것이라면 연명 치료를 할 생각이 없다.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야 할 것 같으면 떼어 달라. CPR도 하지 말라. 많이 아프다 갈 것 같으면 모르핀을 많이 투여해 달라. 눈을 감고 있어도 그 날 날씨를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비나 바람, 햇빛이 솜털에 닿게 해 달라. 만약 나만 보이는 손님을 만나게 된다면, 내 고양이면 좋겠다. 내 맘대로 안 될 테니 곁에 고양이 사진을 놓아 달라. 내일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은 괜한 의무감으로 내 침대를 둘러싸고 있지 말라. 혼자 죽게 해 달라.


장기기증서약을 했으니 죽고 난 뒤에 필요한 건 꺼내라. 쓸 만한 게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술 담배는 안 했으니 아주 나쁘진 않을 것이다. 수의는 삼베로 해 입히지 말라.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미리 사 두겠다. 장례식 같은 건 하지 말고 바로 화장을 해 달라. 고양이 수지의 수염을 모아 놓은 게 있다. 다른 건 버려도 되지만 그게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건 싫다. 나를 태울 때 잊지 말고 함께 태워 달라.


그리고 내 골분은 작은 단지에 넣어 유리 문짝 안에 처박아 놓지 말고, 해 뜬 날 탁 트인 데에서 바람에 날려 달라. 비행기 티켓 값은 내 방 책상 두 번째 서랍에 있다. 가서 좋은 호텔에 하루 묵고 맛있는 밥 한 끼 먹을 돈도 같이 넣어 둔다. 가진 것이 없어서 더 나누어줄 것은 없다. 내게 뭔가 기대한 것이 있다면 미안하다.


저자는 막상 자기의 일이 되고 나면 죽음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점점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글쎄, 나는 철이 들 무렵부터 내 죽음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언제야? 지금이야?’하고 말을 건네며 줄곧 내 뒤를 따라왔다. 어떤 것에도 위로받지 못할 때는 그나마 죽어 없어질 몸이라는 생각을 한 뒤에야 조금 나아지곤 했다. 그래서 죽는 건 오히려 가장 큰 위안이다.


우리는 한 번뿐인 삶을 조금이라도 더 잘 살아볼 방법은 매일 고민하지만, 죽음은 괴로울 때만 떠올린다. 삶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거기서 오는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거기 집착한다. 하지만 괴로움은 자꾸만 밀려나 결국 잊게 될 작은 점에 불과하다.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는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 그건 어머니 몸을 빠져나오던 때부터 시작되었다. 크게 원을 그리며 살다가 시작점의 어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그리는 원 안에 사랑하는 것들을 얼마나 담았는지 다시 들여다본다. 스쳐 지나갈 것에 집착하지 말자. 만약 사랑하는 것을 잃거든 갑작스러운 상실감에 비탄에 빠질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만큼 마지막 호흡까지 어루만져 주어야겠다. 사랑하는 것을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야겠다. 그러려면 우리는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하는가? 봄기운에 싹을 틔운 꽃망울, 가을 산을 물들이는 단풍, 산비탈에 걸린 석양, 아름다움은 스러지기 시작하는 순간에 가장 강렬하다. 석양은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저문다. 우리는 위태로운 삶을 너무나 소중히 여긴다. 눈앞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변화무쌍한 삶에 간절히 매달린다. 우리는 나날이 빛나는 특별한 삶을 찬미한다. 하지만 태어난 모든 것에는 죽음이 따른다. 아무리 다정하고 완벽한 만남도 결국엔 헤어짐이 있다. 우리는 스러져가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책 속에서)






샐리 티스테일 /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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