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은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다시 늘어난다.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혀지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 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 흘린다. -『데미안』, p.28-
프란츠 크로머요? 걘 잘 지내나요? 전쟁통에 살아남았는지 어쨌는지 따로 들려오는 소식이 없어서 말이죠. 갑자기 열 살 때 얘기를 해 보라니,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뭐 못할 것도 없죠.
그 때 우리는 누가 제일 막돼먹었는지 자랑하기 따위를 하고 있었어요. 혼자만 고고한 척 했다가는 흠씬 두들겨 맞고 주머니를 털리기 딱 좋은 상황이었어요. 내가 못돼 처먹은 개자식임을 꾸며서라도 증명해야 했습니다. 열 살짜리 머리로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나쁜 짓이란 게 결국 도둑질밖에 더 있겠어요. 좋은 사과 한 자루를 훔쳤다고 했죠. 그 바람에 크로머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고요.
글쎄 그 자식이 열 살짜리 어린 애한테 2마르크나 가져오라더군요. 내 저금통에는 크로머가 원하는 돈이 들어있지 않았어요. 부모님 돈에 손을 대는 상상을 했어요. 크로머의 헛짓거리를 막지 못하면 전 꼼짝없이 도둑놈이 되고 마니까요. 하지만 이리 한들 저리 한들 전 이미 타락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햇빛이 내리쬐는 어머니의 정원이 아니라 하녀들의 공간에 발을 담그게 됐단 말입니다. 착한 아이 상을 받기엔 너무 추악해진 거예요. 더 이상 장밋빛 뺨을 한 착한 소년, 라틴어 학교에 다니는 부잣집 꼬마가 아니게 된 저는 너무 괴로웠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언제 처음 죄를 지었나요? 아이고 저런,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모르겠다고요? 그래도 잘 생각해 보십쇼. 일곱 살 때 반지층 집의 욕실에서 샤워하는 아저씨를 훔쳐본 거요? 아니, 홀딱 벗고 창문 열어 놓은 그 사람이 정신 나간 거 아닙니까? 열 살 때는 놀이터 미끄럼틀 밑에서 불장난을 하셨다고요. 아, 제가 아는 그 불장난 맞는 거죠? 성냥개비로 하신 거라고요? 그렇다면 별 거 아니군요. 모두 장난에 불과해요. 그런 것 말고 말입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식은땀이 나고, 밝은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넘어오는 기분이 되고 마는 더러운 짓을 한 적이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으십니까? 어머니의 정원에서만 뛰놀던 당신을 지하 계단으로 인도한 일이요. 음, 플랫폼이 플랫폼이니만큼 그만 캐물어달라고요? 좋습니다.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듣도록 하지요.
크로머 얘기는 그만 해 달라고요? 데미안 얘기를 듣고 싶으신 거군요. 데미안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 편지부터 좀 보시겠어요? 이건 내가 데미안에게 모두이면서 아무도 아닌 누군가를 그려 보냈을 때 받은 답장이에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있어 보이죠? 압락사스는 신이면서 사탄이래요. 이런 멋진 말은 데미안 밖에 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데미안 말은 이거예요. 한쪽 규범 안에 자기 자신을 가두지 말고, 선한 본능과 악한 본능이 모두 자기 자신임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사실 나는 세계를 어떻게든 양분하려고 애썼거든요. 밝은 쪽과 어두운 쪽, 착한 쪽과 나쁜 쪽, 아름다운 쪽과 추한 쪽 등등. 그리고 나는 밝은 쪽의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내 자신을 다그쳤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줄곧 내가 외면하려던 더러운 욕망도 내 일부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데미안이 추궁했냐고요? 아니요. 성에 눈을 뜨면서부터였어요. 그건 다른 세계가 아니라 내 안에서 시작된 거였거든요. 나도 내 누이를 불러낸 크로머랑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거죠. 한쪽의 나를 부정하려는 노력을 해왔으니 괴로웠을 수밖에요.
그게 중요해요. 인간이 모순 덩어리라는 걸 인정하는 거요. 내가 마지막으로 데미안을 보았을 때, 나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의 경계에 있었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날 구원하러 왔죠. 하지만 이제 내가 간절히 원할 때마다 달려와 주지는 못한다고 했어요. 내가 내면에 귀 기울이면 거기 자기가 있을 거라고 했죠. 데미안은 더 이상 외부의 누군가가 아닌 거예요.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왔어요. 내가 데미안이고, 데미안이 나이게 된 거예요. 처음의 난 데미안과 전혀 달랐지만 결국 데미안과 같게 돼요.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더럽고 추악한데 결국엔 그게 자기 자신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나요? 괜찮으니 말해 보세요. 따돌림을 당했었군요. 그리고는 또 따돌림 받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을 따돌렸고요. 세월이 지나 미쳐버린 그 애를 지하철에서 만났을 때, 어땠어요? 나는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한 잘못을 했을 뿐이고, 결국 그 앨 거기까지 몰아간 건 그 이후의 다른 누군가일 거라고 생각했나요? 또 뭐가 있죠? 인사 고과 점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 땐 공정하지 않다고 분노하면서, 남보다 잘 받았을 땐 이보다 더 공정할 수 없다며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도 선생님의 모습이군요. 맞아요. 인간은 모순 덩어리예요.
뭐 어쩌겠어요. 그게 인간인 걸요. 우린 모두 신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 살인한 카인인 거예요. 그리고 보통 사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