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짝사랑을 좋아했다. 학교 축제에서 밴드부 보컬이 노래를 너무 잘해서, 미술 선생님이 그림을 잘 그려서 등등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다.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과 이어질 리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픈 순간까지 즐겼다. 고백은 하지 않을 거고 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서 나의 놀이가 끝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백했다 차이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쩌다 잘 됐다손 치더라도 좋아하는 감정이 드라마나 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평생 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짝사랑은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귀찮은 일에 대해 아무 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지금에 와 다시 생각해 본다. 그게 짝사랑이긴 했던 걸까? 본질을 파악하길 포기하고 ‘설렘’이라는 감정을 ‘가지는 것’만 즐겼던 것은 아닐까? 「소유냐 존재냐」를 읽으면서 내 수많은 짝사랑의 역사와 함께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혼자만의 결론을 내렸다. 사람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이런 태도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전에 읽은 책 「상자 밖에 있는 사람」에서 이르길, 자기가 뒤집어 쓴 상자를 인지하고 거기서 나와 상자 바깥의 사고를 하라고 하였다. 타인을 완벽한 타자나 대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욕구를 가진 존재로서 대하라는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하는 소유와 존재의 개념 역시 상자의 안과 밖에 각각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를 테면 ‘소유’는 상자를 뒤집어쓴 사람의 실존 양식이고, ‘존재’는 상자 바깥에 있는 사람의 실존 양식인 것이다. 상자를 뒤집어쓴 사람들에게는 내가 중심이다. 나와 세계를 분리하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 대상의 본질에 닿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고작 겉모습을 인지한 것을 가지고 ‘알았다’, ‘가졌다’라고 여긴다. 나의 소유하는 사고방식은 ‘사랑이 뭐 대단한 거라고. 어차피 끝나 버릴 거 놀이처럼 나 혼자 즐기다 끝내자’는 ‘90점만 넘으면 되지 뭘’, ‘이쯤 알면 어디 가서 아는 체는 할 것 같은데?’, ‘나는 여기엔 전혀 소질이 없나 봐.’, ‘저 사람은 구제불능인데?’ 등으로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 채 내가 세상을 보고 사고하는 프레임으로 굳어 있었다. 그런 편협한 사고로 낸 결과치에 기준을 미리 맞춰 놓고 겉핥기를 하는 과정이 행복했을 리가 있겠나. 이 책에서 말하는 ‘존재’하는 법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한 이유가 이제는 어느 정도 와 닿는다.
<천리안>, 르네마그리트
이 책에서는 여러 가지 가치관을 소유와 존재의 개념으로 대조하여 제시한다. ‘학습’에서의 소유는 필기나 암기를 하는 것으로 그것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새로운 것에 대응하려는 마음가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반면 존재는 고찰하고, 수용하고, 대응하는 모든 능동적인 행위이다. 이때는 새로운 관념이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대학생 때 듣고 싶어 넣은 과목과 어쩌다 보니 끼워 넣은 과목의 집중도가 어떻게 달랐는지 떠올려 보자. 한 쪽은 수업시간마다 질문 거리가 떠올랐을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다른 것에까지 연결되고 확장되는 아하 모멘트를 겪었을 것이다. 그 과목을 공부할 때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 어쩔 수 없이 넣은 과목은 어땠는가. 나눠주는 유인물이나 달달 외워 시험이나 잘 보자는 생각으로 수업에 임하고, 내 기억 표면에 발라놨던 공부 내용들이 시험 종료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런 예에 비추어 보면 학습에서 말하는 존재는 탐구이다. 그리고 시험 결과가 아니라 공부를 한 과정 전체인 것이다.
아래는 이 책에서 제시한 소유와 존재의 다른 예들이다.
어떤 쪽에서 플러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가? 주의 깊게 보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쪽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소유’가 아닌 ‘존재’로서의 실존방식을 택해야 하는 이유가 단지 그 쪽 줄에 있는 게 ‘옳으신 말씀이라서’는 아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본성을 완벽히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자기 안에서 소유와 존재의 비율을 잘 조정해야 한다. 따라서 소유 사고방식을 하게 하는 상자를 경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편협한 사고는 금방 곁의 것을 물들여버리기 때문이다.
대단하지도 않은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어느 날인가, 나는 내가 가진 재능을 하나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다. 진짜로 탐구하여 머리에 담은 것이 모두 동난 것이었다. 그러니 지적 허세로 독서를 하지 말자. 또 언제는 인생이 행복의 연속인 적이 있었던가. 결혼 후에 바뀔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결혼에 대단한 의미를 두고 이 생활이 생각만큼 재미없다고 불평하지 말자. 나는 마음이 맞고 잃을 걱정 없는 친구와 계속해서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회사에 다니는 것은 나의 원대한 포부 때문이 아니라 서로 힘을 모아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아 보는 데 있다. 깨알 같은 일들에 일희일비하거나 가진 것을 모두 걸려고 하지 않아야겠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려던 소유와 존재는 개인의 행복을 탐구하는 차원이 아니었겠지만 내가 가진 그릇이 작아 담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뿐이다.
어떤 걸 금방 좋아하고 금방 포기하면서 나는 그것이 넓고 얕게 아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분야에 통달한 사람들을 그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것처럼 부러워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달리 먹어야겠다. 내가 행복하지 않았던 이유는 본질을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인생 전반에 걸쳐 짝사랑은 그만 하고 요즘말로 ‘찐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해야겠다. 세상을 사랑하는 과정이 바로 행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