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도, 대머리도 뭐 그냥 그러려니 하겠는데, 마지막 노래는 듣고 나면 은근히 기분이 나쁘다. 내가 세상에 나고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생각할 문제이지 타인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뭐 절망적으로 못생긴 것도 아니다. 내 이목구비의 평화를 운운하기엔 상대방도 만만찮다.네 이목구비 평화에니 힘쓰라고 쏘아붙이고 나니 뭔가 착잡하다. ‘그러게. 나는 왜 태어났지?’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나을 것 같던 질풍노도의 이십대가 다 지나가고, 어느덧 삼십대 중반이 되었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는 문제는 여전히 난제이다. 한때는 “열심히 한 그 일”이 삶의 의미인줄 알았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기도 전에 관두고 말았다. 다시 텅 빈 지금에 와 생의 의미를 찾자니 어쩐지 좀 심난하다.
이번 생은 글렀나!
<어떻게 살 것인가(생각의 길, 2013)>는 유시민이 정치인 인생에 방점을 찍고, 본격적으로 작가로 살기에 앞서 본인의 인생관을 정리한 책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왜 사는지도 모르겠는 마당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유시민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불의에 맞서고, 젊은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장관님도 하고 국회의원도 한 작가님”과 “어찌어찌 대학 졸업하고 취업문을 통과해 통장을 스치는 월급에 괴로워하면서 희미한 꿈과 희망을 쫓는 보통사람인 나”의 간극이 거의 우리 은하에서 다른 은하계까지 만큼이나 먼 것 같아서였다. 이 책을 읽으면 오히려 착잡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모두 내 오해였다. 그의 ‘어떻게’는 ‘왜’를 아우르는 모든 고민의 시작이었다.
저자는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며,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하려고 작가의 길을 택했다. 나라고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내 삶은 울퉁불퉁 희미한 선이고, 유시민의 삶은 굵고 힘찬 선이다. 왜 다를까. 남과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매슬로가 자기실현한 사람을 본받길 권했잖은가. 스스로 뼈를 때리자면 이렇다. 유시민은 신념을 가지고 의지대로 그은 선이지만, 내 삶은 무수한 자기기만이 모인 선이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행동한 반면 나는 생각만 하고 앉아만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인생의 의미를 자기 안에서 만들어 가려 노력했지만, 나는 밖에서 찾으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사람과 내일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생의 결과 값이 같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인생 시계가 자정을 치진 않았으니 이제부터라도절신을 차리면 된다. 천하의 유시민도 인생의 반 가까이 살고 나서야 행복한 삶의 기준을 정하지 않았는가. 얼마나 빨리 찾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진짜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하는 것을 깨닫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내용이 많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쉽다. 저자가 너무 자연스럽게 글쓰기를 사랑하고 있었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 나왔던 듯도 싶지만, 충분조건으로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고 필요조건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연습을 했을 것이다, 맞지 않으려고 진술서를 하루에 백 장씩 썼던 것과 읽는 사람이 가방에 넣어 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명서를 쓰던 것이 그에게는 몰입이고 연습이었다. 그는 그것이 좋은지 싫은지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일을 해 보았다. 도중에 판단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아니 나는 어떤가. 조금 해 보니까 잘 안 돼서 포기한 것들은 지금에 와 세어 보려 해도 세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에 지녔던 애정 내지는 책임감이 먼지만큼이나 가벼웠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못한 채 인생의 표면에 내려앉았다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유를 따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 일을 좋아하며, 오직 그것이 간절하고, 지금 나의 상태를 남과 비교하지 않고, 빠르든 느리든 내 나아감만이 즐거울 수 있는 일을 발견하는 것은 좀체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러니 '나도 어려웠노라'하고 그 과정을 백 장짜리 진술서를 쓰던 때처럼 좀 더 생생하게 담아 주었더라면 본받는 게 아니라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책이 되지 않았을까?
죽음이 목전에 있는 것처럼 사는 태도 역시 본받아 마땅할 것이나 그것은 뜻을 정한 뒤의 일이다. 내일 당장 죽을 거라면 오늘을 사랑하는 존재와 보내겠다는 바람이 가장 클 지도 모른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일 년 뒤에 죽을 거라면 최소한 이것만은 이루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일을 찾자.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하루 분량으로 잘게 쪼개어 해나가는 것이다. 사는 의미의 윤곽이 뚜렷하게 잡히는 시기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서른이, 마흔이 무슨 마지노선처럼 정해져 있는 것 같지만 아니다. 누군가는 의미 이전에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해야 한다. 계기 없이 혼자서 하긴 힘들다. 그럴 땐 내미는 손을 잡는 것도 좋다. 나는 유시민이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바라건대 저자가 자신을 돌아보며 책을 써냈으니 이제는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줄 책도 한 권 내면 어떨까. 제목이 정해 놓은 범주가 너무 크고 너른 탓인지, 그의 인생리 높은 데 있는 탓인지 뒷짐 진 어른처럼 고매한 철학을 논할 때가 있었는데, 나로서는 조금 답답했다. 유시민의 필력으로 유시민의 사상을 담되 다음에는 철학자가 아닌다정한 잔소리꾼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이 책에서 몇 구절은 따로 적어 두고 싶다.
1. 닥치는 대로 산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며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원망할 수 없다. 삶의 존엄과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2. 도전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와 넘지 못할 벽에 매달려 인생을 소모하는 것도 어리석다. 내게 적합한 나무, 노력하면 넘을 수 있고 넘는 게 즐거운 벽을 잘 골라야 한다.
3.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4. 세상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내가 하는 일들은 의미가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임을 인정하고, 삶이 사랑과 환희와 성취감으로 채워져야 마땅하나 좌절과 슬픔, 상실과 이별 역시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요소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5. 칸트의 정언명령대로 살 것.
6. 좋은 혁신 아이디어와 제도 개선책을 만든다고 해서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층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우고 혁신의 동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옳은 개혁도 실패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7. 출생처럼 내 선택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주어진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 조금 더 쉽게,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고 싶다면 김진애의 책 <한 번은 독해져라>를 읽어 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