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 정착하는 꿈을 꾸고 바둑기사 이기는 A.I.를 만드는 시대라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구식이다. 원시시대에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 본능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기도 하고, 인문 고전을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쌓는 고상한 내가 본능 따위에 굴복하다니!'라며 믿을 수 없어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행복의 기원> 저자인 연대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가 그렇다고 하니 진화론도 심리학도 공부한 적 없는 우리로선 일단 그런 줄 알아야겠다. 인생의 몇몇 전환기에 사는 의미를 고민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도 이 책에서 알 수 있었다. 요컨대 풀포기고 인간이고 태어난 목적은 애초에 없다. 과학이 말하길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는 우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유 없는 우주에 떨궈진 우리의 최대 목표는 '생존'이다. 행복 같은 게 아니고 말이다.
빛나는 태양, 풀 한 포기, 사람이 겪는 고난 모두 다 신이 이유가 있어서 이 세상에 나게 한 거라던 '밀양' 속 대사가 생각난다.
본능은 말 그대로 본능이기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선에서 우리를 교묘하게 조종한다. 생존에 유리한 행위를 할 때마다 행복감을 느끼도록 해 놓은 것이다. 우리의 뇌는 그저 그런 풀대기보다 기름진 소고기를 먹을 때, 혼자 지내는 것보다 후손을 남기기 위한 행위를 할 때 행복하다고 생각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기름진 소고기 먹을 돈도 없고, 사랑을 나눌 짝도 없다면 조금 덜 행복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소고기를 먹는 일, 애인을 만드는 일에 크게 집착할 필요 또한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뭐든 금세 잊고 마는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한 번 얻은 행복감이 평생을 간다면 사냥에 성공한 동굴에 누워서 굶어 죽을 것이기에 인간은 행복감을 잊고 또 사냥에 나서게끔 만들어졌다. 나를 평생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만들 것만 같았던 사건들도 고작 3개월 정도 나의 감정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말 그대로이다. 평생 지고 가야하는 불행, 평생 지속될 수 있는 행복은 없다. 그러니 감정에 너무 집착하고 나를 내맡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해 지려는 노력을 조금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행복을 로또처럼 생각하며 아직 가지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가진 사소한 일상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책에서 이르길, 행복은 강도가 아니고 빈도라고 한다. 아주 작은 행복을 촘촘하게 배치하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 먹는 케이크 한 판보다 매일 한 조각씩 먹는 초콜릿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공이나 운수대통 따위에 행복의 지분을 너무 많이 둔다. 책에서 말한 대로 being이 아닌 becoming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행복하려면, 지금 내 곁에 있는 고양이의 눈을 마주치며 부드러운 털을 빗길 때의 충만한 감정, 건강한 두 다리와 맑은 정신으로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냈음에 대한 감사함 같은 것들을 재료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자기 분수에 맞는 행복을 찾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재용이 되었든, 회사원 김 모 씨가 되었든 그런 작은 것들에서 행복감을 느끼려 하지 않는다면 행복의 빈도가 그리 잦지 않을 것이고, 두 사람 모두 별로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거다. (부자라고 졸라 행복한 게 아니다.) 이런 특성을 좀 더 발전적인 데 쓴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로 목표를 쪼개어 성취해 나가며 기쁨을 느끼고, 결국은 목표를 이뤄내는 것 아닐까?
저자의 말에 따르면, 행복의 요건 중 하나가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도 원시시대부터 유전자에 새겨져 온 정보 때문이다. 사냥해 배를 채우고 추위에서 나를 지켜줄 집을 지을 때는 혼자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기에 타인은 생존에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동료를 얻는 데 도움이 되는 특성은 외향성이다. 여기서 한 가지 비보를 전하자면 외향성은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게 행복 개인차의 50퍼센트를 좌우한다고 한다. 내향적인 사람은 일단 행복 스탯을 조금 깎고 시작하는 것이다. (저요!!) 내향적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과 어울렸을 때 고통을 느끼는 게 아니다. 그들 역시 다른 사람과 어울렸을 때 더 행복하지만, 디폴트로 가지고 있는 장벽 때문에 어울리기가 너무 힘이 드는 것이다. 다른 것이 모두 같다면, 교실이나 사무실에서 사람 가리지 않고 넉살 좋게 모두와 어울리는 그 친구가 나보다 행복감을 좀 더 느끼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친구가 자기 외모를 맘에 안 들어 하고, 남보다 좀 더 가지지 못했음에 분통 터뜨리는 타입이라면 타고난 특질도 별 힘을 쓰지는 못한다. 행복은 나와 나의 세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친구랑 있을 땐 외향적이지만, 상사랑 있을 땐 내향적인 나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한 가지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저자는 집단주의가 한국에 사는 사람들을 덜 행복하게 한다고 했지만, 젊은 사람들의 행복을 앗아간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자기 개성을 발휘하고, 서로 그것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진지 꽤 되었다. 다만 그들, 혹은 우리는 정말로 미래가 불안할 뿐이다. 집값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솟기 전에 빚까지 져서 소유해야만 하고, 언제 회사에서 잘릴지 모르니 지금 버는 돈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병든 사회에서 순간순간의 행복에 집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먼 미래를 내다보려 할 수록 여기 있는 행복은 자꾸만 놓치게 된다. 내가 점점 불행한 사람(행복을 느끼는 빈도가 낮은 사람)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여기 나온 내용은 아니지만 <팩트풀니스(Factfulness)>에서 이르길, 우리는 생각만큼 불행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조회 수를 늘리려는 미디어의 자극적인 기사 제목들이 우리가 서로 양극단에 놓여 있는 것처럼 조장하고 있을 뿐이다. 잘 버는 사람들은 행복하고, 우리는 그것 때문에 상대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은 집단 정체성에 파묻히고, 극단에 놓여 쉽게 분노한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이 거는 불행이라는 최면에 걸린 채 불을 뿜기에 바쁘다. 저자 서은국이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내가 볼 수 있는 현상을 다라고 여기면 안 될 일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를 살아 왔다. 나의 시대만 특별히 불운하지 않다. 스스로를 너무 불쌍하게 보지 말자.
슬프다고 생각하면 진짜 슬프다고! 웃어!
미뤄 놓은 행복은 다 늙어서 떠나는 여행과 같다. 젊은 날에 누리지 못한 행복을 보상받으려고 지팡이를 짚었을 때에야 여행길에 나서지만, 성치 않은 다리로 걸으며 침침한 눈으로 본 이국의 종탑이 생각보다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내 앞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저 사금파리가 평생 나타날지 어떨지 모르는 금광보다 분명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장 보통의 행복을 찾아보는 것은 어떠한가?
+) 목표 없이 살라는 게 아니다! 행복이 ‘물질이나 먼 미래, 목표를 이루는 그 자체’가 아니니 행복의 빈도를 늘리기 위한 노력은 따로 하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