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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가 Sep 09. 2019

이기주의자의 고백



전에 판사 문유석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쾌락 독서>라는 책이다. 저자는 특유의 소탈함으로 그 책에 자신의 독서에 대한 경험과 철학을 풀어냈다. 그래서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기 전에 판사 문유석의 이미지는 그저 주위 어디엔가 있을 법한 농담하기 좋아하는 책덕후였다. 그런데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나니, 마음이 따뜻하지만 한없이 냉철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하나 더해진다. 개인주의자라는 말의 뜻을 언뜻 떠올려 보면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일 것 같지만 이 책을 읽고 곰곰 생각해 보면 ‘저마다 가진 개별성을 존중하는 사회’,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환경이 처음부터 같지 않음을 인정하는 사회(그래서 나의 성취를 오롯이 내 능력 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회)’,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좀 더 가지려고 하며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신뢰를 쌓는 사회’ 속의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그가 하려는 말이 너무 많아서 어떤 말로 간추려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할 수 있느 ㄴ여러 말 중에 명경 같은 그의 생각에 비추어 '가난'에 대한 내 편견을 고해하려 한다.


사진은 가산동이 아님!



나는 가산동에 산다. 가산동은 예전의 가리봉동이다. 말이 좋아 디지털단지이지 예전에는 공단이 있던 곳이다. 잘 닦인 길 주위에 어디서 이름 들어본 기업 사무실이나 아울렛 같은 것들이 모여 있지만 그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 단지 너머로는 조선족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다. ‘아파트 주민’인 나는 버스정류장에 내려 ‘조선족 동네’를 가로질러 퇴근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주름이 푹 팬 까만 얼굴, 그들이 길을 걸으며 피고 있는 담배의 냄새, 목적도 없어 보이는 비틀거리는 발걸음, 인도에 쌓아둔 요양원 쓰레기, 술주정. 이런 것들 사이를 지나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들 사이를 지나는 동안 나는 담배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또 위험해 보이는 사람을 얼른 지나쳐 가려고 ‘흡!’하고 숨을 참은 채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빠른 걸음을 걸었다. 퇴근 시각에 기분이 아무리 좋았어도 그 길을 지나노라면 언제나 신경이 곤두서서 기분 좋은 일도 다 잊곤 했다. 바라노니 길을 걸을 때 하루 살이가 힘들어 찌든 얼굴 말고 행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TV에 나온 맛집에 간다고 작년에 들렀던 동부 이촌동에서 본 동네 주민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개인주의자 선언>과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읽고 나니 나의 철없음이 부끄러워졌다. 




무기력하고 더러운 것으로 단정 지은 것에 결코 섞이고 싶지 않아하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 하며, 그게 뜻대로 안될 경우 불공평이라고 광광대며 이날 이때 것 살아왔다. 정확히는 아니란 걸 알면서도 이 세상은 못사는 사람,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 잘사는 사람 같은 걸로 나뉘어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묻어나왔다. 그리고 이런 길을 걸을 때면 길 위의 사람들이 언제 날 공격할지 모르는 사람과 선량한 나로 나뉘어 있는 것 같았다. 가난 때문이기도 하지만 뭘 더 배우고 싶은 생각도 없는 사람들일 거라고. 가난 대물림이나 할 거면 왜 애를 낳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내 중심으로 장벽을 쌓고 내가 허용한 것들로만 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싶어 했다. 내가 넘어가고 싶어 하는 벽 너머는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고, 언제나 합리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만 가득한 세계였다. 나는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교오양’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이성적이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이 모든 걸 ‘가난의 풍경’에서 읽고 속단하였으며, 그들과 나의 세계를 칼로 베듯 정확하게 구분하여 생각하려 한 것이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타지 혹은 어떤 그룹에서 ‘어떤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을 때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프랑스 파리에 신혼여행을 갔을 때 퉁명스러운 얼굴로 우리가 말한 것과 다르게 음식을 가져다 준 서버, 남편의 머플러를 벗겨 멀리 던져버렸던 백인 남자애들에게는 우리 역시 이분된 세계에서 저 너머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 때 질 낮은 파리 놈들이라고 흥분했던 나와, 못사는 동네를 지나치며 얼굴 찌푸리는 내가 같은 사람이라니 좋은 말로는 미숙했고, 조금 심한 말로 하면 내가 좀 역겹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표리부동하며 이기주의적인 위선자이다. 간혹 미친 자들이 섞여서 질서를 어지럽히긴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무슨 위아더월드 외치며 직업 비자를 가지고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에게 까지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우리 세금을 쓰자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난과 나의 어리석음에 대해 말해 보았다. 그들은 생활이 가난하지만 나는 생각이 가난한 사람이다.





나만 잘되려고 내것이 아닌 모래성 아래와 중간의 모래를 그러모으고, 그 옆에 다른 성을 짓는다. 빼앗은 모래로 지은 성은 모두가 손을 모아 두드려 주었던 성만큼 튼튼하지도 크지도 않다. 파도가 조금만 거세져도 금세 휩쓸려가고 만다. 그리고 모두의 성도 빼앗긴 모래 때문에 금세 허물어진다. 모래성이 더욱 단단해지려면 모래성 주위의 사람들이 모래를 보충하고 두드려 주어야 한다. 그것은 남이 내 것을 빼앗지 않을 거라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가장 아래에서 맨 위까지 모든 개인이 함께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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