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모자를 쓴 쥐

죽음과 도파민네이션을 읽고.

by 최호진

왜 살아야 하는가?

한때 붓다와 같은 수준의 스님만이 이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때 나를 회상하자면 한 손에 권총을 든 마약 중독자 같았다. 어느 날이고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길 것만 같은 불안함이 있었다. 그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누구에게든 권총을 겨누고 질문하고 싶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 그 총구가 부처님으로 향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다. 질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답변이었다.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건 없는 것이다.


허탈감에 총을 놔버린 뒤 그냥 되는대로 살았다. 미래 같은 걸 고려하지 않고 그날그날 감정적으로 충동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그런 와중에 제품 개발 연구원으로 취직하고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했음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때 난 게임이나 웹소설, 포르노물과 같은 디지털 미디어와 알코올과 니코틴에 중독되어 있었다. 매일 무절제하게 갈망하는 모든 걸 했다. 회사 생활은 순탄치 못했고 어느 날 사직을 결심하게 됐다. 그 결심은 바뀌지 않았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집으로 내려왔다. 그럼에도 바뀌는 건 없었다. 매일 쾌락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고 잠에 들 때 패배자처럼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내게 남은 미래는 극도로 단순해 보였다. 살아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파민 모자를 쓴 쥐 이야기를 아는가? 내가 읽은 '죽음'이란 책에 등장한 일종의 사고실험인데 다음과 같은 동물 실험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당신 앞에 쥐가 한 마리 있다. 그 쥐는 버튼만 누르면 쾌락을 느끼는 도파민 등의 신경전달물질을 뇌 속에 주입하는 모자를 쓰고 있다. 당신은 쥐 앞에 놓인 버튼을 누르고 쥐는 쾌락을 느낀다.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당신이 누르지 않아도 쥐가 알아서 미친 듯이 버튼을 눌러댈 것이다. 그것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그리고 책에서는 이렇게 질문한다. 쾌락 모자의 인간 버전이 있다면 머리에 쓰고 싶은가?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가상세계보다 더 완벽 버전의 경험기계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기계는 완벽해서 중요한 성취로 느끼는 쾌감부터 미남 미녀와의 사랑, 음식의 맛까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경험을 할 수 있다. 당연히 모피어스의 빨간약이나 기계군단의 배터리가 되는 신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 인셉션의 원하는 꿈을 꾸게 하는 기계를 상상해도 좋다. 그런 기계가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사용할 것인가?


처음 이 질문을 읽었을 때 머리를 누가 깃털로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앞선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은 듯했다.


쾌락이 선이고 고통이 악이라면 당연히 그 기계를 사용해야만 한다. 쾌락주의를 신봉한다면 내부적 경험,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것만이 옳고 그름의 절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계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그 경험은 전부 거짓이다. 가상세계에서 아무리 중요한 성취를 하더라도 실제세계에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실제로 먹은 것은 아니다. 매트릭스가 너무 정교하고 영악해 매트릭스에 들어오기 전 기억을 지워도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런 점을 거북하게 느낀다면 내부적 경험만이 옳고 그름의 절대적 기준이 아님을 시사한다. 인생은 내부적 경험만이 아닌 실제 세계와의 관계로부터 얻는 외부적 경험이 있다. 누구를 도와주고 중요한 성취를 이뤄 세상을 바꾸고 외부적 경험은 실제로 이루어진 사실들의 집합이다.


마침내 난 오랫동안 알고 싶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어냈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얻지 못한 이유도 함께 깨달았다. 난 그 질문의 속뜻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이렇게 고쳐서 해야 했다. 왜 죽고 싶은가.


난 스스로를 쾌락주의자라고 믿었다. 인생의 가치는 쾌락과 고통을 더하거나 뺀 그 총합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루기 힘든 성취대신 매일 이룰 수 있는 일상의 성취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보상은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받아야 하는 급박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도파민 모자를 쓴 쥐로 격하 시켰다. 불행한 천재보다 행복한 바보, 굶어 죽는 소크라테스가 아닌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난 행복할 수 없었다. 오히려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다.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매일 하며 총이 있다면 머리를 날려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결국 난 진심으로 쥐와 같은 수준으로 격하당하고 싶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쾌락주의를 신봉한다는 자기기만으로 과오를 억지로 합리화시키며 거짓말로 중독 문제를 회피하며 살아온 것이다. 진심은 그 반대의 삶을 원하면서 그것이 이루기 힘들까 봐 실패하면 모자란 존재로 비칠까 봐 거짓말로 자기 위안을 삼은 것이다. 마치 여우와 포도 이야기의 신포도처럼 말이다.


난 이제야 솔직하게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 원하는 것을 깨달았다. 난 될 수 있는 한 최고 버전의 내가 되고 싶다. 최대한 많은 그리고 질적으로 높은 좋은 것들을 삶에 채워 놓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인내도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을 이유 따위가 없어졌다.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을 이어나가게 할 나에게 특효한 대책도 마련했다. 첫 번째는 정언. 거짓말하지 않고 스스로나 남에게 솔직히 말하기. 두 번째는 알아차리기. 스스로의 감정과 생각을 유심히 살피고 그것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그것이 과연 적절한, 합리적인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앞선 깨달음은 전적으로 두 권의 책 때문이었다. 한 권은 앞서 언급했던 죽음(DEATH), 다른 한 권은 도파민네이션. 죽음은 죽음의 형이상학적 본질과 인식, 윤리 등 철학적 고찰을 통해 삶의 의미와 방법을 통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으며 도파민네이션은 중독의 과학적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그것의 해악성을 깨닫게 했으며 나아가 중독을 치료하는 실천적 방법과 실제 사례를 알려줘 큰 도움이 되었다. 본인의 이야기에 공감이 가시는 분들이 있다면 꼭 읽어보시라 권유하고 싶다. 그러면 죽음을 직면할 때 삶을 통찰하고, 회피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직면할 때 자기자신을 통찰하는 지혜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어떻게 살 것인가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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