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수면 위로 몸을 던지는 이유
인간은 알다시피 사회적인 동물이다.
생명에 위협을 받거나
정신적으로 힘든 순간들이 닥치면,
인간은 언제나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생존을 연장해왔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목숨을 위협하는 맹수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므로,
이 시대에 주고받아지는 많은 도움들은
대계 '인간관계'에 관한 것들 이리라.
나는 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을
잘 들어주려는 편이고
고맙게도 작은 고민에서부터
남들에게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나 상처들을
내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들의 심정에
나의 눈빛과 고개 끄덕임과 어깨 토닥임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기댈 수 있는
마음의 쉼터가 되기를 바라곤 한다.
하지만 정작 나는 머리가 복잡하거나 힘이 들 때면,
누구를 붙잡고 내 이야기를 털어내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난 누군가에게 내 영혼을 보여주기를 꺼려했다.
내 깊은 속까지 다 보여주기엔 겁이 났기도 했고,
장남의 장남의 장남으로 태어난 탓인지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알량한 자존심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혹은, 나의 문제는 오직 나만이 풀 수 있으며
굳이 내가 아니어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조금씩은 저마다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난 언제나 사람이 아닌 펜과 종이를 찾았다.
필자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까불고
장난기가 많아 오락부장도 하고
친구들의 생일파티에 꼭 와서
재밌게 해달라는 '러브콜'들을 받곤 했다.
그러나 정작 집에 혼자 있을 때는
조용히 어머니가 사다주신 책들을 읽었고
마음속에 차오르는
알 수 없는 생각들이나 감정들을
어딘가에 쏟아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만화 '썬가드'나 '케이캅스'에 나오는
로보트들이 그려져 있는 작은 스케치북 위로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만의 시들을 써내곤 했다.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내 책장을 정리하시던 어머니께서는
스케치북에 쓰여진 내 시들을 읽으셨고,
당신의 아들은 '천재'가 틀림없다며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베스트셀러 이외수 작가에게
조언을 받기 위해 거의 반강제로 나를
그가 머물었던 강원도로 데리러 가시려고 했다.
10살 남짓이었던 나는 창피함을 감추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다행히 어마어마한 흑역사 중 하나를
내 인생에서 지워내는 데 성공했다.
돌이켜 보면 글을 쓰는 것은
내게 있어서 걸음마처럼
내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었고
내가 생존하는데 이미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있었다.
과거에 나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기를 바라며
글을 쓴 적이 없었다.
국어시간에 주어진 주제에 맞춰서
글을 쓰는 것이 즐거웠고,
강제성을 지극히 싫어하지만 종종 생각이 많아질 때면
일기 숙제를 세장씩 써서 내곤 하는 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내 국어 과제로 썼던
시를 나의 동의 없이 학생들에게 읽어주며
"너희들 모두 OO싸인 받아놔라.
OO는 나중에 분명히 유명해질 거야"라고
으름장을 내며 함께 장난치고 놀던
내 친구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고,
혹은 다른 동료 선생님들에게
나의 어머니께서 내 동생을 출산하신 후
산후조리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어낸 일기를 보여주고는
그들의 눈가를 촉촉하게 만드시곤 했다.
나 스스로를 위해 썼던 글들이 남에게 읽혀지면,
언제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사진을 찍으면 그 순간의 모든 감각과
기억들을 담아낼 수 있듯,
나는 사춘기 시절과 유학생활 때도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순간을 담고 싶어
흰 종이 위로 나의 대뇌피질을,
문자로 그려내곤 했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나의 마음을 그려내는 글보다는
남들을 설득하거나, 에세이 점수를 잘 받기 위한
찍어내는 글을 쓰는 일들이 잦아졌고
한동안 나는 흰 종이를 통한
내 자신과의 깊은 대화에서 단절되었다.
군대 안에서 '일말상초'를 경험하기 전 까지는.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 당시에 내가 지켜야 했던 조국의 하늘은
처참하게 어둡기만 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남들은 수두룩하게 경험하는 일말상초 일화지만
오래 만났던 나와 내 첫사랑 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스물 넘은 건장한 사나이들이 우글대는 곳에서
'그깟 여자친구' 하나 잃었다고 며칠이고 몇 달이고
끙끙 앓기만 할 수도 없는 판이었다.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니게 애매하게 끝을 내며
'나쁜 여자'의 타이틀을 거부한
그녀의 책임회피로 인해,
나는 남은 군생활 1년 동안
첫 유학생활 이후 보지 못했던
나의 어두운 자아와 다시 한번 대면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저녁 10시 취침소등 후
행보관님의 허락하에 매일 12시까지
독서실에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고,
잠들기 전엔 꼭 '감정일기'를 썼다.
전역할 때까지 쓴
두 권의 '감정일기'를 쓸 때만큼은,
어떠한 필터링 없이 아무 생각하지 않고,
노트 위로 흑연이 부서지듯
내 감정이 부서지는 대로 연필이 춤을 추게 두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일기장들을 다시 펼쳐본 적이 없다.
(아마 서제 책장 어딘가에
깊숙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 당시에 그 일기들을 썼던 내가,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며
거기서 나온 글들은 나의 산물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싶기 때문일지도.
다시 사회생활을 하고 여행을 다니면서
나는 거짓말처럼 곧바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고,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다시 '나를 위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내게 있어 흰 종이와 펜은
또 다른 나를 만나게 해주는 징검다리였고,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내 자신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거울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내 모습과
나 홀로 있을 때의 나는 언제나
전혀 다른 사람이었고,
그런 내 두 모습 간의 괴리를
우연히 목격하게 된 소수의 반응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뉘어졌다.
'갑자기 너답지 않게 왜 이러냐'며
당황한 채 핀잔을 주거나,
(심각한 표정에 말이 없어지는 건 우울한 게 아니라
그냥 무표정으로 멍 때리고 있는 건데...
뭐 이렇게 생겨먹은 게 잘못일 수도 있겠다마는)
아니면 나를 너무 잘 알아서
조용히 이해하고 침묵해주거나.
이따금씩 그런 나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때때로 나는 '내가 정상이 아니라
무슨 이중인격자 같은 존재가 아닐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도 한다.
나는 원래 한 번 글을 쓰면
정신없이 써 내려가는 스타일이다.
글의 퀄리티가 어떻든 간에 나는 막힘없이 의식의 흐름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브런치에 글을 쓸 때는 희한하게도
한 줄 한 줄 조심스레 써 내려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만의 관성을 잃어
갈 곳 없이 헤매는, 쓰다 버린 글들이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 넘쳐나지만)
무슨 방식이든 간에, 어떠한 생각이나
감정을 기점으로 한 줄 한 줄 써내려 가다 보면
나는 항상 그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잊고 있었던 오래된 경험이나 기억들이
머리를 불쑥 내밀기도 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현재의 오묘한 감정의 색깔이
정확히 무슨 색깔인지 알게 되거나,
나 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던
복잡하게 뒤섞인 생각들과 감정들이
정성스레 차려진 밥상 위의 한 끼처럼
아주 예쁘고 정갈하게 정돈이 되어있곤 한다.
내가 무엇에 관해 글을 쓰건 간에,
고뇌 끝에 글 한편의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나면,
나는 속이 참 많이 후련해진다.
남에게 언제든지 빌려주는
나의 젖어 있는 어깨에 반해,
다른 사람의 어깨에는 결코 기댈 수 없는
나의 저주받은 인격체 덕에
오늘도 나는 내 젊은 날의 생각들과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그대로
'글'이란 마법 같은 순수한 매개체를 통해
그대로 인화시켜 놓는다.
종이가 잉크에 번지듯,
필름 위로 상이 서서히 맺히듯,
하나의 결과물이 생기기 전까지,
또 다른 나 자신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면서 말이다.
시간이 훌쩍 지나서 그 결과물들을 바라봤을 때,
결과물들이 내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
그때 보다 더욱 젊었고,
바보 같았지만 순수했던,
꿈과 열정이 넘쳤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젊은 청년의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둘이 마주 보고 서있을 때,
서로가 한점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레 미소 지을 수 있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바로 내가 인생을 살면서,
고래가 수면 위로 몸을 던지듯,
가끔씩 깊은 숨을 들이마실 수 있는,
나만의 살기위한 생존방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