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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씀 Jul 26. 2018

아, 개꿈을 꾸었다.

어른들의 정(情)에 대한 단상.

사랑하는 나의 반려견을

새로운 주인에게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낯선 모습이었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강아지의 눈동자에서

나는 단숨에 내가

이 강아지의 주인이란 걸 깨달았다.

강아지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라도 챈 듯,

슬피 울며 내 바짓자락을 물며 끌었다.

녀석은 두 손 두 발을 쓰며

나를 끌어안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고,

나도 그 친구를 꼭 끌어안았다.

내 동생은 녀석을 보는 마지막 날이라고,

평소에는 절대 입지 않는 치마를

예쁘게 입고 나와서

내 옆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


새벽에 나는 꿈에서 몸부림을 치며 깨어났다.

꿈도 여간해선 꾸지 않는 내가,

꿈 때문에 자는 도중 일어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내가 일어났을 땐,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배게 한 편이 이미 축축이 젖어있었다.


약 7년 전, 극심하게 악화된 동생의 아토피 증세로

우리 가족은 코코를  다른 집으로 보내야 했다.

1년 넘게 가족으로 지냈던 우리 집 막내와,

우리 가족은 그렇게 생이별을 맞이해야 했다.

내가 한 평생 강아지를 가지고 싶다고 졸라대도

단칼에 내 말을 잘라내시던 아버지는,

늦둥이 딸이 애견샵에서 만난 코코를 보고는

이 강아지를 갖고 싶다며 졸라대자, 흔쾌히 그 자리에서 녀석을 데려오셨다.

멍청하지만 멋지게 생겼던 코코는,

나와 동생뿐만 아니라

동물을 지극히 싫어하는

우리 부모님의 사랑까지 얻어냈다.

털 달린 짐승을 싫어하신다는 우리 아버지는,

코코를 품에 안은채 코를 맞대고

밝게 웃으시곤 했었다.

녀석은 그렇게 우리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어느새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어있었다.


코코를 보내고 나서,

동생은 몇 날 며칠이고 참 많이 울었다.

몇 달이 지나고 나서도, 동생은 코코 이름만 들으면

이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여전히 코코를 그리워하는 동생을 위해

나는 새 주인에게 어렵사리 연락을 드렸고,  

그렇게 코코와 우리 가족은

처음이자 마지막 재회를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였는데도,

녀석은 우리를 기억했다.

잠깐 화장실 다녀오는 사이,

코코는 엄마가 나오기까지

꼬리를 살랑거리며 화장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짧고 아쉬운 만남이었지만, 포동포동 살이오르고

털이 길어 한결 더 멍청해보이는

귀여운 녀석을 보며

우리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고,

그 날 이후로 동생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정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깨닫는다.

어른이 되면서, 관계의 유한함을 의식하며

우리는 마음의 벽을 조금씩 조금씩,

더욱 높게 쌓아 올린다.

언젠가 찾아올 이별이 두려워,

새로운 만남을 더욱 두려워하는

역설적인 우리의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쉽사리 정을 주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같은 곳을 다치고 또 다치면 ,

우리의 살갗에는 굳은살이 생긴다.

같은 상처를 또 다시 쉽게 받지 않도록,

우리 몸은 그렇게 스스로를 방어한다.

나는 굳은살이 잔뜩 배긴 손으로,

새로운 인연에게 악수를 건네고 싶지 않다.

어렸을 적 보드라운 아기의 손처럼,

열린 마음으로 해맑게 웃으며 손을 건네고 싶다.


함께했던 기억들이 오랫동안 간직되어

사랑했던 이들이 떠나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 추억이 되어

반짝반짝 빛이 난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유한한 것이 아니리라.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나는 오늘도 애써 박혀있는 굳은 살을 떼어낸다.


한 때 보드랍던 내 손을 핥곤 했던,

멍청하지만 사랑스러운

우리집 막내 코코를 기억하면서.


보고싶은 우리 집 막내, 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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