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의 땅, 실리콘 밸리에서의 1년.
하늘은 푸르고, 햇빛은 매섭게 따갑다.
그러나 그늘 아래로 부는 시원한 바람은
완벽한 하루의 기분을 완성시킨다.
나는 지금 여느 때처럼
날씨 좋은 Sunny California의 마지막 주말에,
아이스커피와 함께 여유를 부리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길 것만 같던 1년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렸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일생의 파이에서
1년의 조각들은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곤 했던,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셨던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의 비유가 문득 생각이 났다.
내 지난 1년의 파이도 과연
나의 남은 일생에서 가장 커다란 한 조각이었을까.
익숙한 미국 땅이었지만,
다시 터전을 떠야 하는 이 놈의 역마살을 한탄하며,
나는 작년 여름 이맘때, 출국을 앞두고
한창 우울함에 잠겨있었다.
그때 썼던 글들을 보면 어찌나 자기 한탄을 했는지,
이제는 우습고 부끄러워
다시 읽을 수가 없을 지경으로 말이다.
나는 분명 내가 미국을 가서도
잘 적응하여 살 것임을 확신했고,
나중에 당시 내가 쓰고 있던
글을 돌이켜 읽게 된다면
내 스스로를 비웃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지만,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족과 함께
3개월 이상을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나는
뒤늦게 자아의 혼란이 왔었던 것 같다.
집 떠나 사는 아들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지신 부모님과,
오빠는 또 떠나나 보다 생각하고 있을
내 띠동갑 여동생에게,
과연 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어떤 존재일지, 차마 알기가 두려워졌었다.
사실 당시 함께 인턴쉽을 하기로 했던 학생은,
인턴을 시작도 하기 전 회사 사장님과
인턴쉽과 관련하여 메일을 주고받다가
불화에 휩싸였고
학교 측에서도 그 불화가 퍼져,
학교 측에서는 나까지
인턴으로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나는 학장님께 구구절절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고,
방학 도중 급하게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는 KTX에 올라 학장실을 찾아갔다.
인턴 학생 한 명이
회사에 부정적인 인상을 남긴 상태에서,
내가 타지에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고
1년간 일을 할 수 있겠냐는 것이
학교의 입장이었다.
학교 측의 걱정은 감사했으나,
나는 이 인턴을 반드시 가야했고,
나는 학교를 설득해야만 했다.
"학장님, 저를 걱정해주시는 마음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학교 측에 대한
우려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학장님, 저는 어렸을 적부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이 건강한 몸뚱아리를,
젊음을 무기 삼아 최대한 진흙탕에
굴리고 싶다 생각해왔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고,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의 진흙탕에 몸을 굴린다면,
제 하얀 백지에 무엇이든 묻어,
장래에는 하나의 경험으로서
제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성인이 되자마자 막노동일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들과 과외,
그리고 최근 IT기업에서의 인턴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저는 원래부터가 생긴 것이 날카롭게 생겨서
첫인상이 좋았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여
고용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것이기에,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왔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언제 어디서든,
함께 일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나왔습니다.
제가 학장님 앞에서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아니지만,
나름 짧지 않은 26년간의 인생을 살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면,
노력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능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을 때,
언제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비록, 태평양 건너 타지에 있는 회사이지만,
저는 유학의 경험도 있고
지난날의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인턴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자신이 있습니다.
지금은 걱정이 많으시겠지만,
1년이 지나서 제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저희 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얼마나 일을 잘 하는지,
이 회사가 똑똑히 느끼고
우리 학교에 감탄할 수 있도록,
학교의 이름을 드높여 돌아갈 것을
제가 반드시 약속드리겠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나는 눈을 부릅뜬 채
교수님들께 내 의지를 전달했고,
나의 간절한 호소에 마음이 움직이셨는지,
급하게 소집된 미팅에서 학장님과
관련 교수님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시며
학교의 계획과는 다소 달라지게 된
나의 인턴쉽을 허락해주셨다.
미국 남부의 깊숙한 곳에서
4년이란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미국 동부의 중심지에서 대학교 1년을 보내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5년 만에,
나는 그렇게 미국의 서부의
중심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사장님께서는
나와 인사를 나누고 싶다하시어,
12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씻지도 않은 채
나는 이민가방 두 개를 들고, 회사로 향했다.
실리콘 밸리에서의 인턴쉽이라는
거창한 간판에 내심 기대가 부풀어
비행기에 올랐지만,
막상 생각보다 훨씬 작았던
회사 오피스의 대문을 마주했을 때,
나는 이 곳이 앞으로 내 1년간의
전투장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어마어마한 대기업을 꿈꾼 것은 아니었지만,
유리로 된 벽에 마커로
서로의 아이디어를 짜내는 회의실과,
커피머신 앞에 서서 현재 트렌드에 대한 의견들을 공유하는 카페테리아 따위는 없었다.
한국에서 신격화시키는 실리콘 밸리의
간판 기업들은 수많은 기업들 중
극히 일부분이었고,
대부분은 살벌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회사들이 대부분이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원한다면 오늘 한번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질문에
시차적응의 ㅅ도 시작하지 않은 채,
나는 이등병마냥 열의에 차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다들 일을 하느라 바쁘다 보니,
사장님은 10불을 내 손에 쥐어주시고는
회사 바로 옆에 있는 햄버거집에 다녀와
점심을 먹은 후 일을 바로 배워보라 하셨다.
5년 만에 미국에 와서 먹은 내 첫끼는,
Carl's Junior 햄버거였다.
경영학과를 나온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기계들과
반도체 관련 용어들에 대해 배워야 했다.
나는 마케팅 '인턴'이었지만,
회사에는 마케팅 부서 자체가 없었다.
나는 분명 인턴으로 갔으나,
내 존재 자체가 사실 마케팅 부서였던 것이었다.
그 누구도 마케팅이나 사용하는 툴에 관하여
내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고,
각자의 일들이 너무 바빠
나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내 자리에 배치된 직후로,
컴퓨터 앞에 앉아 모든 것을
스스로 배워 일들을 해내야만 했다.
인터넷을 끊임없이 뒤져가며
회사의 전반적인 아이덴티티와 시장에서의 위치,
그리고 제품군들과 고객층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중,
내게는 거침없이 다양한 과제들이 주어졌다.
무슨 툴을 쓰던지, 어떤 과정을 거치던지,
주어진 일에 대하여
좋은 결과만 내오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구글 검색창은, 1년간의 인턴쉽 동안
나의 아버지였고, 스승님이었고,
나의 베스트 프렌드였다.
분명 쉽지 않은 1년이었다.
코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문과생이었던 나는,
HTML을 이용하여
웹사이트 페이지들을 수정해야 했고,
포토샵도 만져본 적 없는 내가,
회사 웹사이트의 광고 배너들과 로고들,
제품 사진과 영상 등등 마케팅에 활용될
미디어 컨텐츠들을 제작하고
웹사이트에 직접 띄워야 했다.
다양한 툴들을 찾아내,
예산 승인을 받은 후 랜딩페이지들을 제작하거나,
보유한 고객들의 연락처를
Email marketing tool을 사용해
mass email template들을 제작했다.
또한, 회사의 구글 애드워즈 계정을
내 스스로 관리하고, 예산에 맞춰진 한도 내에
다양한 광고들을 만들고, 새로운 영역을 시도하고, 트렌드에 맞춰 새로운 기능들을
광고에 더해야 했다.
인턴쉽을 하면서 이론적 지식의 부족을 느낀 나는,구글에서 주관하는
두 가지 애드워즈 자격증을 따냈다.
또한 자발적으로 구글 비즈니스 계정을
새롭게 개편하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이 작은 회사가
큰 규모의 회사처럼 보일 지를 고민하며
직접 걸어 다니면서 구도를 생각하여
회사 외부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기도 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배급사들과 연락하여
새로운 고객들을 찾을 수 있도록 협력했고,
다양한 마케팅 프로모션들을 제안하여
(거절도 많이 당했지만),
실제로 직접 고안해낸 프로모션을 통해
고가의 제품들의 세일즈 몇 개를
클로즈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말이 마케팅 인턴이지, 나는 별의별 잡일부터
과연 인턴이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것인가 싶은
커다란 일들까지 모두 수행해왔다.
나의 슈퍼바이저는 항상 내게,
"너는 마케팅 인턴이 아니다. 스스로를
이 회사 마케팅 부서 매니저라 생각하고 일을 하라"라고 말하곤 했다.
(마케팅 부서에 막내이자 우두머리기도 했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가 전혀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유튜브처럼 세계를 이끄는
거대한 대기업에서의 인턴은 아니었지만,
작지만 내실있는 IT 회사에서,
나는 다양한 경험들에
직접 손을 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세상에 어떤 일개 인턴이 내가 해온 일들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겠는가.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면 다양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고,
내겐 그저 돌이켜보면 모든 것들이
참으로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다양한 경험과 툴, 인사이트와 지식들보다도
이 곳 인턴쉽에서 내가 얻어낸 가장 큰 배움은,
회사에서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인지와
코워커들과의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함께 협력하는 것, 그리고 각 회사 상태에 따라
존재하는 제한적인 부분들 안에서,
어떻게 타협점을 찾고 최대한 긍정적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효과적인 솔루션을
찾아낼 수 있는지가 아닌가 싶다.
글의 서문을 쓴 지 며칠이 지나고 나서,
이제야 공항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카페는 아니지만,
이곳의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햇빛은 따가우며, 바람은 시원하다.
어쩌면 내 인생의 지난 1년 파이 조각은,
그리 작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