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제 Oct 16. 2023

- 아나 -

아나 vs 야몽따이


일찍이 터를 잡고 살고 있었던 우리 집을 제외하면, 어릴 때 살던 우리 마을은 대부분 집 없는 떠돌이들이 흘러들어온 부랑인들의 거주지였다. 그들은 시유지에 멋대로 밭을 일구고 집을 지었다. 우리 집 창문에서 훤히 보이던 공동묘지를 에워싸듯 집들이 들어섰고, 덕분에 흉흉했던 분위기도 많이 가려졌다. 우리 가족만 살던 휑했던 시기엔 안 보이던 고양이가 사람이 늘자 덩달아 늘어났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고양이는 주인이 없었고, 부랑인들로 이뤄진 마을에서 밥을 챙겨줄 여유가 있던 집도 우리 집뿐이라, 자연스레 고양이들은 우리 집 주변에 모여 살았다. 우리 집은 배와 고구마, 벼농사까지 지었기 때문에 농작물을 망가뜨리는 쥐 때문이라도 고양이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키우는 고양이가 아니더라도 밥 먹으러 오는 녀석은 모두 거둬 먹였고, 사람들은 동네에서 보이는 고양이는 다 우리 집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시골 고양이들은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다녔다. 이 집 저 집 가리지 않고 쥐를 잡아서 어디 가서도 미움받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집 고양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해코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팔자 좋은 속 편한 삶은 아니었다. 한겨울에 밭에서 얼어 죽기도 하고, 쥐약을 먹고 죽기도 했다. 밥을 먹으러 오는 고양이는 서른 마리까지 불어나기도 하고, 순식간에 다섯 마리까지 줄기도 했다.

엄마는 잔밥을 대부분 개를 먹였다. 고양이는 배불리 먹이면 쥐를 잡지 않는다 해서 잊을만할 때나 밥을 줬다.


“아-나!”


낡은 양푼 냄비나, 또는 조금 부스러진 플라스틱 대접에 그날 남은 잔반을 담아서, 엄마는 고양이를 불렀다. “아나!”라고 부르는 그 말은 엄마의 입을 통해 수백 번도 더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어색했다. 동네에서는 누구도 고양이를 아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양이를 나비라고 불렀으니까. 나비라는 호칭도 어린 내가 생각하기엔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양이면 고양이지 나비는 또 뭐야? 고양이를 나비라고 부르는 어원에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탄다고 해 ‘잔나비’에서 따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원숭이를 싫어하는 나는 이 말도 참 마음에 안 들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고양이에다 왜 원숭이를 갖다 붙인담? 동네 어른들은 고양이가 나비처럼 팔랑 팔랑대며 다니니까 나비라고 하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차라리 그쪽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엄마도 나비야를 붙여서 부를 때도 있었다. “아나-나비야!”하고.


“엄마 아나가 무슨 뜻이야?”


“몰러. 엄마 살던 동네에서는 다들 고양이 부를 때 아나라고 했어. 느 외할머니도 그렇게 불렀고.”


엄마만의 이상한 말버릇이라고만 생각하고 나는 또 이 말을 잊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나’가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단어임을 알게 됐다. 엄마만 쓰는 말이 아니었구나. 내가 어색하다고 느꼈던 엄마만의 말버릇은 표준어이거나 오래도록 써온 우리 고유의 말이었다. 그저 식견이 짧은 내가 모르는 말이었을 뿐이었다. 아쉽게도 어원은 알 수 없었지만 ‘아나’는 고양이를 부를 때 사용하는 순수 우리말이었다.


집 주변에 모여 사는 고양이를 대체로 아버지는 ‘괭이새끼’라고 호칭했다. 이름을 따로 지어주신 적은 없다. 내가 고양이와 놀고 있으면 ‘괭이새끼 끼고 살지 말라’며 호통을 치셨다. 그러다가 가끔 ‘쥐 안 잡고 밥 축내는 야몽따이들!’이라고 부르실 때도 있었다. 엄마와 열 살이 차이나는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부터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가 일본어와 한국어가 요상하게 섞인 단어를 썼다. 벼락같은 목소리가 떨어지면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나와 고양이들은 동시에 도망치기 바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미있다.

엄마는 ‘아나!’하고 고양이를 불러들이고, 아버지는 ‘야몽따이!’하고 고양이를 쫓아냈었네.

 

작가의 이전글 - 링크가 돌아왔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