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상처받은 어린 나를 대하는 방법
그 사람은 사사로운 친절에 인색한 편이었다. 가령 함께 식당에 가면 상대방 앞에 수저를 놓아주고, 물잔을 채워주는 행동. 음식을 제 몫으로 놓아주는 점원에게 전하는 감사의 인사.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할 때 점원과 눈을 맞추고 잘 먹었다며 몇 마디 대화를 하는 것. 그런 것들에 영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과 교사 대 학생, 또는 엄마와 아이의 입장으로 만난 것이 아니므로 그런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결례라고 생각해 함구한 채로 몇 차례 만남을 가졌다.
그러다 그 사람과 연인이 되려던 무렵. 관계가 진전되는 일에 발목을 잡은 게 바로 그 모습들이었다.
종종 사람의 행실에 대해 논할 때 쉽게 통용되는 말들이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약자를 대하는 모습을 잘 봐야 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문장들이 머리를 빙글빙글 돌며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숱하게 많은 시간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행동은 그 문장 속을 거닐어 다닌다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상대방이 사용할 식기를 함부로 만지는 일에 소극적이고, 누군가와 눈을 맞추는 일이 낯설고, 남들과 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 그 사람은 마음의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살았다.
몇 년을 다닌 단골 미용실에 가도 헤어 디자이너와 별 말을 섞지 않았다. 머리를 남의 손에 맡긴 상태로 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는 무선 이어폰을 꼽은 채였다. 자는 척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자신을 차단하고 있었으니까.
그 때 그의 속은 온통 시꺼먼 숯과 같았다. 치유된 적 없는 마음의 상처는 붉다가 뻘겋다가 이내 까만 상흔이 되었다. 그 흉터를 들킬까봐, 너무 불쌍한 사람으로만 비춰질까봐, 그 사람은 차라리 사회성 없다는 말을 들으며 사는 쪽을 택했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에서 주인공 수전은 네 자녀를 키우며 흔한 말로 독박육아를 하는 주부다. 배우자 매슈가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고백한 뒤 수전의 인생은 돌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고독한 시간을 필요로 하며 자신만의 공간을 갈망하게 된 수전은 한 호텔 방을 빌려 하루의 일부분을 그 곳에서 보내게 된다. 19호실에서 수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매슈에게 19호실을 들켜버린 수전은 사실 자신이 불륜을 하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자신의 심정을, 매슈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을 이해시키는 일에 사용할 에너지가 소진된 사람은, 차라리 이상한 사람이 되는 편을 택하기도 한다. 그 편이 편하니까. 남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마치 수전처럼, 나의 그 사람은.
남들을 이해시키는 행위 대신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쪽을 선택했다.
후에 그 사람은 내게 덧붙여서 설명했다. 미용실에서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싫었던 탓도 있었다고. 나는 그 사실을 듣고 밤새 마음이 아파서 뒤척였다.
상처. 우울. 자기혐오. 대인기피. 공황. 쉽게 진단명을 붙일 수 있는 증상들이 사실은 사람마다 다른 규모로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어린 날 받았던, 성인이 되어서도 ㅡ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ㅡ 치유되지 않은 상처 몇 가지가 잠식되어 있다. 누군가는 그 상처의 자리마저 잊고 살아가지만 혹자는 그 상처 근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
그게 언제적 일인데.
겨우 그까짓 것 때문에 아직도 그래?
남의 상처를 쉽게 가늠하고 재단해서 도리어 더 상처를 내 놓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피해서 상처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기도 한다.
나 역시 평생 잊히지 않는 인생의 몇 가지 부분이 있다. 그 부분들은 나를 이루는 뼈대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상처는 없어도 되었을 일이고, 내 삶을 이룩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저 타인에 의해 입혀진 피해일 뿐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자신에게 닥쳤던 불행을 모두 제 탓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폭행과 정서적 학대를 받았다. 퇴근을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잠에 든 척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폭행은 계속 되었고, 심지어는 나와 만난 이후로도 몇 차례 얻어맞고 왔다.
반지 낀 손으로 뺨을 때려서 그의 뺨을 부어 있었고, 긁혀 있었다. 저보다도 덩치가 작은 남자임에도 위축부터 되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우습게도 그의 곁에는 “그래도 아빠인데...”, “연로하신 분이 때려봤자”라며 그를 불행으로 몰아세우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연인이 되니 마니 문턱에서 인연을 정리하려던 나는 생각을 바꿔 그 사람에게 그 사실들을 찬찬히 일러주기로 결심했다. 그와 나는 인생에 한 번의 우연으로 마주쳤을 수도 있는 관계였지만, 그 사람이 나를 지나친 후에도 조금 더 따뜻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가 겪었던 불우한 과거에 대해 잘 들어주고, 그 일들을 딛고 자라난 모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말해주었다. 남에 대해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차라리 욕을 하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 그는 식당에 마주 앉으면 물잔을 먼저 채워준다. 점원에게 감사하다고 짧게 말한다. 저를 칭찬하는 ㅡ외모나 패션 아이템 등의 단편적인 것들을ㅡ 이들에게 넉살좋게 미소 짓는다. 미용실 사장님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서른도 훌쩍 넘은 남성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은영 전문가나 강형욱 전문가가 느낄 성취의 티끌을 맛보았다.
사람은 너무 쉽게 마음을 닫지만, 또 너무 쉽게 변하기도 한다. 상처는 작디 작은 압력에도 생기지만 금세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기도 한다.
작은 친절에 인색한 사람들은 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감정을 채워놓는 마음의 바구니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 공허함을 버티느라고 재차 마음을 닫고, 말문을 봉쇄한다. 학습한 긍정이 없으니 감사를 표현하는 일에 서투르다.
그런 상황에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성향으로 방향을 정해 마구잡이로 뻗어가는 사람도 있다. 분노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자라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유로 범죄자가 되는 이들을 옹호하는 것은 전혀 아니나, 같은 상황에서 그 사람은 적막하게 자라났다.
그의 적막이 때로는 가슴에 사무치도록 애잔하다. 나는 문득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곱씹어보았다. 완벽한,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어쩐지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에게 내 마음이 갔다.
씩씩하게 제 인생을 헤쳐 갈 것 같은 정환이보다, 내가 아니면 무기력하게 바스러질 것만 같은 택이에게 약했다.
내 성정은 그러한가보다. 불행으로 잉태된 씨앗은 나에게서 ‘남을 동정할 줄 아는 마음’으로 발현되었다. 그러한 연유로 친구들의 연애 상담은 물론이고 독자님들과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너무 많은 독자분들이 다양한 형태로 사랑에 아파하고 있다.
사랑을 앓는 일도, 결국엔 사람 대 사람의 일. 내 감정과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고 함께 속도를 맞춰 나아갈 수 있도록 상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연유로 나는 내 마음 속에 사는. 유년기의, 상처 입은, 어린 아이에게 여전히 다정하게 안부를 묻겠다.
잘 지내고 있는 게 맞느냐고. 아픈 마음은 조금 괜찮아졌느냐고. 나의 잘못이 아니었던 일들로 너무 오래 불행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