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을 아는 길을 우리는 뻔히 선택하고야 말 때가 있다. 스포일러가 난무하는 삶은 때때로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삶의 형태가 된다.
우리의 사랑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사실 뻔하다. 행복하고 불행한 그 변덕의 외줄에 혼자 서서 하염없이 앞을 향해 걷기나 할 것이다.
나는 대책 없이 가부터 하까지 사랑 타령이나 하는 게 가장 재밌다. 사랑하면 시간이 갔다. 곰곰하게 한 시간이 갔다.
100년 인생도 짧다면서 더 짧은 16부작 드라마 속에 세계관도 있어야 하고 철학도 있어야 한다니. 한 페이지 시 속에 우주가 있어야 한다니. 사랑만 노래하기에도 100년이 짧은데.
당신의 사랑은 탈무드가 아니다. 교훈을 남길 필요도 떳떳해야 할 이유도 없다.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사소한 역사일 뿐이니까.
존재는 모두 실연에 서툴다. 새침한 영호씨도, 차분한 지수씨도 실연 앞에서는 같은 태도로 무너지곤 한다. 나는 그들에게 친절하고 익숙한 위로를 건네는 글을 쓴다. 그래서 나의 이 공간은 늘 사랑 중이고, 이별 중인 셈. 어딘가를 목적지 없이 걸어가는 이들의 경유지인 셈.
같은 테두리 안에서도 경계선이고 지평선이 될 큰 선보다, 무궁무진하게 솟았다가 가라앉는 감정의 동요를 사랑한다. 따뜻하다가 미지근해지는 관계의 풍경을 이해한다. 사랑이었을, 기어이 사랑이고야 말 순간들을 기록한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간다.
사랑하면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이 끝난 사람을 붙들고 왜 사랑이 끝났느냐고 묻고, 사랑하지 않으려고 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상대방을 사랑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만을 사랑하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상대방만을 사랑한다.
처음 나를 사랑해주던 사람은 어디 가버렸냐고 물었던 시절이 있다. 그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눈앞에 있지만 영원히 없기도 했다. 죽은 것도 아니고, 헤어진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이 변해서 더 이상은 뜨겁지 않아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 과정을 두고 누군가는 섬세하게 슬퍼한다. 섬세한 사람의 사랑이 특별하다곤 하지 않겠다. 그러나 섬세한 사람은 이별 후에도 많은 것을 기억하고 그 기억들을 오랜 시간 복기하곤 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던 첫 마디의 음정을, 그 날의 구름 색깔과, 당신의 수줍던 발끝을. 모두 기억하느라 섬세한 이가 견뎌야 할 밤은 유난히 더 길었다.
사랑의 역사는 참 작고 사사롭기도 하다. 개인의 이야기가 쌓여 남루한 신파가 되고, 특별한 줄로 알았던 우리 사랑이 참 보편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고 나면 사랑도 이별도 참 별 것 아닌 게 돼버린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빠져드는 사랑을, 사랑스럽게 맞이하고자 한다. 다시 없을 오늘의 봄볕으로 빠르게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