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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Apr 30. 2016

어떤 밤

다시 사랑


  이별을 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순간이 있었지.

그때의 나는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했거나, 짙은 미련으로 마음을 놓지 못했거나 그런 이유로 헤어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그 사람은 더 없이 설레어보인다. 치열했던 우리의 연애는 그 사람에게 모두 과거가 되어 있다. 내가 아는 그는 과거를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결국 그는 나를 모두 잊은 것이다. 내가 그를 정리하기 전에 먼저, 그가 나를 정리했다.


  그래서 나는 슬펐다. 우리의 마음은 헤어지고도 속도 차이가 나서, 나는 여전히 그가 그리운데 그의 기억은 여름 옷 정리하듯 나를 뚝딱 처리해버렸다. 그 사실이 힘겨워서 죽고 싶었던 시간이 아주 잠깐 있었다. 우습지만 하루 정도.


  여기까지가 연애였다. 합의하에 헤어졌지만, 한 명은 잊지 못하고 헐떡이는 순간조차 연애의 과정이었다. 그 연애가 종지부를 찍은 것은 그 '한 명'인 내가 그를 털고 일어난 그 순간부터였다. 그와 헤어지고 약 반 년만에 나는 그와 정말로 헤어지게 되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여자가 있다.
헤어질 때 뒤 돌아보는 여자와 뒤 돌아보지 않는 여자.
나는 뒤를 돌아보는 여자다

- 로맨스가 필요해2




  나는 오래도록 뒤를 돌아보는 여자였다. 내가 놓치는 것에 대해서, 미련 남는 일에 대해 오래 곱씹는 여자였다.


  그런 내가 그를 정리했다. 물론 완전하게 잊지는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생각한다. 어떤 노래가, 어떤 음식이 그를 불러오곤 한다. 연애가 완연히 끝나지 못했던 때의 나는 그때마다 무너지곤 했다. 그의 sns를 염탐하다가도 심장이 쿵 내려앉곤 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추억과 직면하는 일에 담담해졌다. 그의 생각이 나면, 그가 떠오르면 그냥 받아들였다. 그렇게 되자 새벽 두시에 연속으로 두 통 걸려온 그의 전화가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오늘'이 드디어 내게 찾아왔다.


  그는 종종 내게 연락했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연락하거나, 사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연락했다. 그것이 단지 찔러보는 것이든지 내게 다시 돌아오고 싶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연애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을 때도 그를 열심히 밀어냈다. 왜냐면 이 이별은 나 역시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내 20대를 모두 함께 한 그를, 스무살 첫 마음 그대로 수줍게 사랑했다. 그런 내게 점점 소홀해지는 그를, 나는 사랑했다. 싸울때마다 점점 더 화를 내는 그를, 나중에는 내 잘못이 아닌일에도 나를 다그치던 그를. 나는 사랑했다.


  그와의 관계에서 내가 가장 잘못한 일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를 사랑해서 그를 위해 참고 견딘 시간들이 그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내 스스로의 가치를 내가 낮추고 있었다. 그에게 점점 더 쉬운 여자가 되어있었다. 그 것이 우리 둘 모두의 이별 이유였다. 그는 내가 지겨웠고, 나는 더 이상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가 내게 다시 연락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에게 맞춘 수제화 같던 여자. 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너무 쉬웠던 여자. 과하게 그를 위하느라, 그를 향한 내 사랑이 무리가 됐던 시간. 그런 나의 사랑을 당연하게 등에 업은 그는 다른 여자 곁에서 온전하게 행복해지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제서야 그와의 연애를 끝냈다. 그리고 혼자인 시간을 만끽했다. 나의 시간과 돈이 모두 나의 것인 첫 시간. 나는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듯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은 무료하고, 영양가 없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분명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 시간동안 나는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마음정리를 끝내고 나니 사랑이 파랑새처럼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스무살 그 때처럼 설렌다. 부푼 가슴을 숨기는 방법을 찾는다.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다고 생각한다. 영악해지기도 한다.


  어떤 손바닥은 내 어깨를 밀쳐 갈비뼈에 금을 낸 적이 있다. 그럼에도 그 손바닥을 잡고 있고자 했던 나의 시절. 그 사람의 손가락 마디마디 어느 한 곳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던 시간. 나는 그 시간을 모두 관통한다. 나의 손바닥에 닿는 생소한 촉감에 가슴이 뛴다. 내게 조심스러운, 꼼지락거리는 그 마음에 두근거린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떤 연애가 끝나고,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설레고 있다. 그리고 나의 영역을 기꺼이 허락한다.


  나는 다시 또, 사랑이 내 인생을 헤집어 놓을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을 하겠다.



  어떤 밤. 나를 찾아 온 어떤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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