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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Aug 10. 2016

복숭아

짧은 글

  물렁한 복숭아의 감촉을 느끼며 껍질을 벗겨내는 동안 이 과일에 엉켜있는 여러 영상이 뼈대만 가진 채 자동 재생 된다. 뚜렷하게 생각이 나지 않는 부분을 곱씹다보면 그 영상에는 퍽 구체적으로 살이 붙는다. 물에 씻어 낸 복숭아는 단단했고 씹는 내내 아삭했다. 희고 붉은 속살을 연신 포크로 찍어대는 동안 맛있다는 감탄을 연발했었다.


  내가 지금껏 먹어 온 복숭아 중에 가장 맛있었던 기억을 꼽으라면 그 때의 것이 단박에 떠오른다. 굳이 기억을 상기시키지 않아도 마트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 온 복숭아가 그 기억을 물고 오곤 한다. 애인이 나를 위해 사들고 온 복숭아를 씻으며, 깎지도 못할 정도로 물렁한 그 것을 만지는 동안 나는 이미 내 안에 정의 되어있는 복숭아를 떠올리고 있었다.


  - 별로 안 달다.


  우습게도 그 때의 복숭아와는 정반대였다. 복숭아의 밀도며 당도며. 그래서 물맛나는 복숭아가 되레 반갑게 여겨졌다.


  나는 앞으로도 복숭아를 만나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기억을 맞닥뜨릴 것이다. 그런데 기억 속 복숭아가 선명한만큼 다행스러운 부분이 있다. 딱딱하고 달콤한 복숭아를 먹을 때면 어떤 계절, 비 오는 바닷가가. 물렁하고 달지 않은 복숭아를 먹을 때면 오늘의 기억이 떠오르겠지. 한가지 개체에 대해 기억이 세분화 된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점차 많은 기억이 복숭아를, 또 다른 어떤 매개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 만큼 원래 고정되어 있던 기억의 비중이 줄어들게 되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을 만나 본 사람일수록 누군가를 편하게 잊을 수 있는가보다.


  나는 묻고 싶다. 너도 복숭아를 보면 내가 떠오르는지. 그 기억은 내게 그렇듯 너에게도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물렁하고 달큰한 복숭아가 먹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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