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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Oct 02. 2016

넌 쓸쓸함에 대해 얘기하면서

나를 찾아 온 과거의 사람

  나는 어떤 노래를 발견하면 그 노래가 모든 감흥을 잃을 때까지 그 노래만 듣는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걷는 내내, 텅 빈 집안이 내는 소리가 싫을 때면 내내, 한 노래만을 듣는다. 다른 노래가 듣고 싶어질 때까지 며칠을 반복한다.


  음악 듣는 취향이 그렇고, 이것은 성격과도 직결한다. 나의 연애 인생에 양다리란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감정이 소모할 때까지 한 사람에게 충실하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충실하던 사람을 벗어나기 전 다른 누군가가 내 인생에 의미를 갖게 되면 전자를 정리한다. 그 것이 전자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이 기본적이고도 당연한 이치는 사실 많은 이들에게 간과 당하고 있다. 나의 전연인만 하더라도 나와 사귀면서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지 않았던가. 그 몰상식한 행동으로 상처를 받는 것은 결국, 그 관계에서 상대를 더 좋아하는 쪽이었다. 전연인과의 관계에서는 내가 그 쪽이었다.


  며칠 전 그 사람을 만났다. 잘 지낸다고, 자신이 요즘 맡은 업무에 대해서 말했다. 언젠가의 우리가 그랬듯 대화는 자연스러웠다. 그는 내 앞에서 말이 많아지던 사람이었다. 묵묵한 목소리, 나만 아는 미소,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와는 자주 싸운다는 쓸데없는 말도 섞었다. 그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나는 적당한 선에서만 감정을 공유하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너와 헤어진지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은 성장한 연애를 한다. 20대를 바쳤다고 생각한 너를 지났으나 나는 여전히 20대에 머물러 설레는 연애를 한다. 지금 나의 곁에 있는 사람은 나를 스무살처럼 들뜨게 하는 사람이다. 나는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데 너는 나에게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한다. 지금 여자친구를 만나보니 내가 너에게 얼마나 충실한 여자친구였는지,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내가 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얼마나 참았는지 모두 깨달았다고. 이제는 나에게 정말 잘해줄 자신이 생겼다고. 그는 어쩐지 여느때의 본인처럼 내게 자신만만하지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느낀것이다. 네가 닿지 못한 시간 내내 홀로 성장한 나를. 나를 단단하게 만든 이 연애를. 자신이 끼어들 틈 없이 나의 안을 밀도있게 채우고 있는 사람의 존재를.


  "너랑 내가 어떻게 다시 만나니. 우리한테 이제 다시라는 말은 없어. 연애의 과정이 모두 끝났어. 내가 너에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 밀고 당기면서 너를 긴장시키기 위함이 아닌걸 알잖아. 우리가 이제는 정말 다 끝나버렸기 때문이잖아."


  나 혼자 너에게 매달리고, 추억을 지우지 못해서 비참해하고, 너의 새 연애를 지켜보는 동안 너 역시 힘들었으리란 걸 안다. 나의 감정선대로 흐른 나의 연애 드라마였지만 함께 주연이었던 너 역시 슬픔을 겪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너의 힘듦은 나의 그것에 조금도 미치지 못한다. 내가 차라리 돌아버리고 싶었던 시절, 너의 앞에서 죽고 싶었던 시절. 그 시절로부터 처절하게 기어서, 손바닥으로 걸어서 간신히 벗어난 내게, 이제서야 널 모두 잊은 내게 너는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한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고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 말을 참 쉽게도 한다.


  "너는 힘들지 않기 위해서 나를 통째로 묻어두고 새 연애를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아는 나는 그런 연애가 불가능한 사람이야. 난 처절하게 그 시간을 견디며 너를 잊었어. 네가 다른 사람 품에서 그사람이 주는 설렘에 기대 나를 잊는 동안, 나는 혼자 견뎠어. 그 지옥같은 시간을 다 견디고 나니까 완전힌 사랑이 다시 찾아온거야. 너의 알량한 연애에 내 사랑을 갖다 대지마. 나를 아직 좋아한다고? 네 여자친구한테 가서 똑같이 지껄여 보지 그래."


  나는 더이상 네 앞에서 울지 않는다. 나의 연인에게 미안해질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매달리는 너와 나의 사랑이 얼마나 다른지 네가 깨닫기를 바란다.


  너의 연인 앞에서 나를 깎아내리며 그녀를 사랑하지 않길 바란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그녀와의 시간을 빛내기 위해 비교되지 않기를 바란다. 너와의 사랑은 이미 모두 끝났다. 나는 너를 모두 털어내었다. 나를 온전히 잊지도, 털어내지도 못한 채 그저 혼자인 것이 무서워 다른 여자를 품에 안는 너와 나는 애초에 다른 연애를 하고 있다.


  네가 말한대로 너는 나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너의 업보다. 너에게 충실했던 여자를 권태롭다는 이유로 밀어냈으나, 그 만큼 충실한 여자를 앞으로는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묘한 불안감. 그것은 네가 연애를 하는 내내 너를 쫓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결국 너는 너에게 나보다 좋을, 나만큼 너를 사랑해 줄 여자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미 박제 된 너의 추억 속 나는 가련하게도 이 세상을 너밖에 모르고 살던 여자가 아니었던가. 너의 기억 속 나 조차 이렇게 변했다. 나는 더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나에게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내가 강단 있게 살아가는 현재가 낯설다. 너는 바랐다. 내가 너를 잊지 못하기를. 언제나 너의 그늘을 헤매고, 그동안 그래왔듯 이번 이별 역시 상처와 긴장과 서로에 대한 소중함만을 남긴 채 다시 내가 너에게 매달려 우리의 연애가 지속되기를. 그러나 나는 너를 모두 털어내었다. 내 안에서 우리의 연애가 소란하다가, 잠시 아름답다가, 지독하다가, 결국은 과거로 박제되었다. 내가 견딘 것은 단지 너와의 이별이 아니었다.


  걸을 때면 너의 팔목을 잡던, 먹다 남긴 음식은 너에게 권하던, 데이트 전 자양강장제를 한 병씩 마시던, 너를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너에게 배운 맥주 마시는 법을, 함께보던 야구 경기를, 너의 잠버릇과 머리칼 자르는 주기를. 모두 견뎠다. 우리의 사랑을 견디느라 내가 그렇게 힘들었다.


  여전히 넌 내게 예의가 없구나. 나는 당당하게 너를 걸어나온다. 아주 조금 슬퍼진다. 내가 사랑했던 과거의 너는 모두 증발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시작하자는 너의 말을 듣고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그래서 슬펐다. 내게 아무런 의미도 아닌 네가, 내 기억 속 나의 연인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를 생각하면 아련해질 수 있는 기회만큼은 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너의 번호를 차단한다. 너를 사랑했던 기억이, 너로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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