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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Dec 27. 2016

2016, 나의 슬픔

1년은 363일 그리고 생일, 크리스마스

  내가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내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나는 정작 행복하게 보내 본 기억이 없다.


  부모님의 손을 타지 못하고 큰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유년기,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덧 가장 외로운 곳을 스스로 찾아 드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혼자 먹는 밥이, 부대끼는 이 없이 홀로 잠드는 집이, 빈 방에 공허하게 울리는 나의 혼잣말이 외롭지만 편했다.


  그런데 1년 중 두날만큼은 집안에 혼자 있는 것이 못 견디게 싫었다. 사랑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행복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기대로 그 날이 다가오기 훨씬 전부터 이미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그 날은 쓸쓸하게 지나가곤 했다. 사람들 속에서 문득, 문득 행복하지 않은 기분이 스치다가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절정에 달했다. 그렇게 고대했던 '오늘'이 불행해지는 기분은 기대감 만큼이나 오래도록 내게 아쉬움을 남겼다.


  20대가 된 이후 모든 그 날에는 나의 엑스보이프렌드가 있었다. 5년이 되던 해 11월에 헤어졌으니 9번이나 그 시간들을 함께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단 하루도.


  그가 군인이어서 떨어져 있던 시간들, 그가 다른 친구들과 술자리 이후 숙취가 잔뜩 남은 채 내게 온 크리스마스, 노력했으나 행복하지 않았던, 사소한 일에 감정이 상해 치열하게 싸운,


다른 여자와 연락을 하고 있던 그를 직감적으로 깨닫고 그와 헤어졌었던 내 인생 가장 불행했던 생일까지.


  나는 돌아오지 않을 내 인생에 특별한 날들을, 비단 생일이거나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빛나던 매일매일의 청춘을 나는 5년간 그에게 헌납했고 결과적으로 불행해졌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아홉날들의 불행이 더욱 생생하게 와닿는 이유는 사실, 그날들이 '그날'이기 때문이었다. 함께 보고 싶었던 영화가 매진이 돼서 볼 수 없고, 음식점에서 한시간동안 웨이팅을 했는데 재료가 소진되었고, 비오는 날 길을 걷다가 구두굽이 부러져 구두가게를 찾아 절뚝거리면서 엑스와 다투던 날들이 '그날'이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서글프게 다가왔다. 그래서 더 불행하게만 기억이 되는구나, 나는 이번 연애로 한해를 보내며 문득 알았다.


  새로운 연인과 함께 맞는 내 첫 생일은 전날 저녁부터 함께했다. 남자친구가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심야영화를 보다가 12시가 넘자 그는 생일 축하해, 속삭였다.


  다음날은 그가 끓여 준 미역국을 먹었다. 내 생일은 초가을인데 여름이 유독 길었던 올해라 에어컨 냉기가 닿지 않는 부엌은 유리문에 습기가 찰 정도로 더웠다. 티셔츠 뒤로 땀이 배어드는 그의 등을 보면서, 머리칼이 엉망이 될 정도로 땀이 흐르는 그를 보면서 나는 문득 울컥하고 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미역국을 입에 집어넣으며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데이트를 마치고 나를 집에 데려다 준 그는 얼마 지나지않아 다시 현관문을 두들겼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선물을 꺼냈다. 평소 내가 매일 쓰는 구강미스트 3개와 머릿결이 안 좋아졌다던 말에 샀다는 헤어 트리트먼트 팩, 함께 키우자며 선인장 화분을, 생일이니까 꽃 한송이를, 열심히 골랐다는 목걸이를.


  선물을 품에 안아들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카드를 읽었다.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 자신을 만나줘서 더욱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나는 그제야 엉엉 울었다.


  더위를 무척이나 타는 그의 땀 젖은 티셔츠가 생각나서, 짜다고 걱정하던 미역국의 맛이 너무도 생생해서, 사랑받는 생일임이 빈틈없이 느껴져서.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날의 내 생일들이, 한살 씩 어렸던 내가 너무 가여워서.


  대학생활을, 직장생활을 타지에서 하면서 스무살 이후 단 하루도 생일 당일에 미역국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엑스는 그런 걸 기대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왜 기대를 하지 않고, 왜 원하지도 못한 채로 술에 취해서 생일 당일 함께 저녁을 먹던 식당 바로 앞 아리따움에서 골라 온 빨간색 섀도우를 사랑이라고 믿었는가. 왜 기어이 그 관계에서 불행을 참아내며 1년 중 이틀을, 나머지 363일을 살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이번 크리스마스 역시 나의 새로운 연인은 성의가 넘쳤다. 크리스마스 몇주 전부터 트리 장식이 되어있는 바틀이 예쁜 와인을 미리 주문해놓고 홈파티를 계획하더니 이브날에는 당일 치기 여행을 제안했다. 함께 떠난 첫 여행은 순조로웠고 아름다웠다.


  그러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싸웠다. 둘다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티격태격하다가 아홉시 영화를 보기 직전 기적적으로 화해했다. 우리는 뒤끝없이 화해하는 편이라 예매한 라라랜드를 보고 나오는 길에는 영화에 잔뜩 젖어 충만하게 집까지 걸어왔다.


  영화가 끝나고 남자친구 집에 도착해 사온 피자를 세팅하자 크리스마스가 이미 20분가량 지나있었다. 나는 갈릭 소스 뚜껑을 뜯으며 말했다.


  - 자기야 크리스마스가 지나버렸어


  와인을 따던 남자친구는 웃으며 내 볼을 잡았다. 뭐 어때. 나는 그를 따라 웃었다. 그 한마디로,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행복해질 수 있었다. 싸웠지만, 별 다른 게 없는 하루였지만 나는 행복해졌다.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어떤가,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이 있는데. 그리고 매년 찾아 올 크리스마스의 설렘이 있는데. 무엇보다 서로가 있는데.


  나의 이 연애는 유독 힘들었던 올해를, 단 이틀만으로 충만하게 했다.


  지나가는 올해가 조금도 아쉽지 않다. 올해가 간들 어때, 우리에겐 내년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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