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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Nov 17. 2016

냉정한 온도

1년 전 네가 그랬듯 나 역시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적이 있다. 오래 함께해 온 시간을, 그 시간이 주는 안도감을, 놓아버리기엔 아쉬움을. 그래서 헤어지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미 사랑은 끝났다. 뜨겁던 감정이 어느덧 미지근한 온기도 남기지 않은 채로 싸늘해졌다. 그럼에도 부정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했던가? 관계를 억지로 유지시켰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연기를 하거나 감정을 숨길 필요 역시 없었다. 그저 지금껏 그래왔듯 행동했다. 서로를 앞에 두고 휴대전화를 만지며, 길을 걸을 때는 습관적으로 손을 잡지 않으며,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집에 가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우리는 연애를 지속했다. 주말이면 시간을 비웠고 그 시간은 서로에게 썼다. 메신저를 하고, 전화를 하면서 종종 사랑한다는 말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관계는 평소와 같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닿았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가? 망설여지던 대답은, 분명 부정이었다. 나는 사랑하지 않고 있었다. 연애를 하는 순간임에도 궁금하거나, 안달니거나, 토라지는 일련의 행동을 모두 않았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와 헤어지지 않았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 참아 온 시간이었다. 헤어지면 나는 덜렁 혼자가 되어버리니까. 그 시간은 너무 고독하고 외로우며, 이별은 언제나 힘겨우니까. 주변에 헤어짐을 고하고 그와의 사진을 정리하는 행동들이 모두 번잡하게 느껴졌다. 그냥, 이 상태로 현상유지는 안 되는 걸까?


  이별은 그가 바라던 것이었다. 나는 혼자 된 슬픔을 감당하지 못한 채 쩔쩔맸다. 술을 마시고 울고 잠에 들지 못했다. 그를 사랑해서는 아니었다. 누구와 헤어지든 헤어짐은 아픈 것이었다.


  시간이 약이 되었다. 나는 힘듦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몇가지 변화가 생겼다. 불규칙하던 월경이 하루의 오차도 없이 균형을 이룬 것. 머리칼이 확실히 덜 빠지는 것. 식욕과 생기가 도는 것. 아프게 올라오던 뾰루지가 나지 않는 것. 나는 그제서야 인정했다. 다 죽어버린 관계를 이어가느라 피폐했던 나의 삶을.


  11월은 그 이별을 지난 딱 1년 째 되는 달이다. 나는 달력을 볼때마다 그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연히 우리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그 날따라 예민하던 너, 그 날따라 화를 참지 못하던 너, 그 날따라 내게 냉정하던 너. 이별을 하기 위해 너의 감정은 이미 그 하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너는 아직도 종종 내게 연락한다. 그리고 한순간도 잊지 못한 '나'를 그리워한다. 나는 처방처럼 네게 말한다. 그 시절의 나는 이제 더이상 없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며 나를 안으려 드는 너는 어느 시절의 나와 닮아있다. 너의 껍데기라도 영원히 품고자 했던 처연한 20대 초반에 나. 그 시절을 지나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된 나. 그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른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내가 이미 겪은 이별이었다. 우리의 추억으로 부터 완전히 걸어나온 나만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우리는 1년 전 그 날 완전히 분리 되었다. 우리의 삶을 분리 시킨 건 너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행복해졌으니 때로는 너의 냉정이 감사하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전화를 끊는다. 이제는 내가 너에게 냉정할 차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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