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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Sep 23. 2016

사랑해서 견딜 수 없는 순간

  멀리서 지켜보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던 그 사람을. 많은 눈동자 속에 들어찬 선한 얼굴은 희미한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목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진 잔상을, 나는 잠시 기억했다가 이내 잊었다.


  그리고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난 순간, 난 묘한 반가움을 느꼈다.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알아요. 나는 그 말 대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단둘이 대면한 그의 얼굴은 훨씬 선한 인상이었다. 큰 키와 넓은 어깨, 흰 피부. 그는 두 번만에 나의 인생으로 끼어들게 된다.


  그 날 우리는 수없는 얘기를 나눴다. 맥주잔을 소주잔을 부딪히고, 웃고 떠들었다. 진지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늘어놓다가도 장난을 치고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세살위인 그는 내게 조금 어른처럼 굴었다. 그 이후로도 조금 더 그렇게 굴었다.


  봄의 한복판에서 그는 나의 이름을 불렀다. 이미 마음이 그로 충만했던 나는 그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보다도 앞서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나에게 시간을 맡겨놓은 채 잠들었던 그가 퉁퉁 부은 얼굴로 깨어났을 때부터, 아니 술없이 백열등 밑에서 닭발의 뼈를 한통에 발라내며 먹었을 때, 내게 요리를 해주던 등으로 나를 어디든 데려가고 싶어했을 때부터, 걸을때면 어깨가 아련히 스쳐지는 감정을, 하루 중에도 공연히 떠오르는 얼굴을,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가슴 벅찬 일이 있을까. 나는 아직도 그의 얼굴을 보면 그를 처음 봤을때의 낯섦이 교차된다. 그 굳은 얼굴, 적당히 오만한 콧대. 모두 나의 것이 되었다. 그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세계에서 나는 유영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단순히 가벼운 연애로 서로의 끼니를 챙기고, 낮과 밤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인생을 나누고 있었다. 둘은 같은 시기에 서로를 받아들이고 펼쳐지는 미래의 인생 내내 등장한다. 그것이 어느덧 당연히, 우리에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이 되었다.


  마음껏 잠 든, 온통 일그러진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모공이 늘어져 있는, 눈썹산이 제멋대로 솟아있는, 예민하지만 부드러운 피부. 주무를수록 탄력이 느껴지는 등. 나는 그 등에 코를 가져다 댄채 마음껏 숨을 들이쉰다. 끌어안고 잠들었던 등은 침구의 냄새와, 나의 체취와, 그 본연의 살냄새를 모두 가지고 있다. 하나가 된 향기가 애틋해서 나는 또 감사하다는 감정 뒤에 숨어 눈물이 난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되어 감사하다. 이 인생에서 그를 만나게 되어,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내 인생에 등장해주어, 행복하다. 그리고 기도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은 오지 않았기를. 내가 그의 등을 안고서 조금 오래 행복할 수 있기를.


  입을 맞추자 어리광섞인 탄성이 터져나온다. 나의 연인은 잠이 많다. 머리칼을 넘겨주고 눈꺼풀에 입술을 가져다댄다. 등을 토닥이다가 굳은 귀를 풀어준다. 다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는 얼굴을 조용히 사랑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네가 알지 못할까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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