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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Sep 09. 2016

어느 덧없는 9월

어느덧 9월


  친구 H는 잘 풀리지 않는 연애를 품에 안고 있다. 그 안에서 H는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애인에 애닳아하고, 자신이 진 사랑의 크기에 고독해하면서도 연애를 놓지 않고 있다. 1년을 향하고 있는 둘의 관계는 이미 통속해질대로 통속해져버렸다. 조심스럽고 긴장되던 관계를 지나 어느덧 H의 애인은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달고사는 전형적인 '갑'이 되었고, H는 애인의 알맹이 없는 이별통보에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을', 아니 어쩌면 을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 정의 연애를 하게 되었다.


  H의 친구로서 그 둘의 관계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권한이 생긴 나는 어쩐지 상투적인 연애소설의 전지적 작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때가 있다. 애인과의 관계에서 무기력함을 느낄적마다 H는 유난히 더 나의 말을 잘 따르곤 했다. 둘의 사이가 조금 호전될 기미가 보이면 그새 제멋대로 관계를 이끌고 나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지만. 어찌됐든 힘들때는 나를 찾는다. 그것이 좋은건지는 사실 모르겠다.


  대학 동기인 H는 예쁘고 여성스러웠다. 그럼에도 털털하고 유머가 좋아 인기가 많았다. 그 친구에게는 당시 갓 입대한 동갑내기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열심히 내조하는 모습이 그녀의 매력도를 상승시켰다. 도도하고 새침해보이는 외모로, 솜씨좋게 도시락을 척척 만들어 면회까지 다니는 여자친구라니. 물론 나는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일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그 일이 얼마나 고된지 깨달은 케이스였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선망 혹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인의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고 이별했다. 두명의 남자가 더 다녀가고 나서야 지금의 애인이 그녀의 곁에 남았다. 그 5년의 세월을 모두 지켜본 나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H는 남자없이 못 사는 여자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캐릭터 중 하나는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열심히 일하던 고은찬이다. 그녀는 올곧고, 정직하고, 꾸밈이 없으며 스물넷 나이 보다도 더 순수하다. 책임감과 생활력이 강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모두 잘한다. 가난하지만 가족끼리의 정 역시 두텁다. 많은 사랑의 기억을 남기고 죽은 아버지, 철없지만 사랑스러운 어머니, 가끔 영악하지만 밤이면 함께 수다를 나눌 수 있는 깜찍한 동생을 가진 은찬은 '공유'를 가졌다는 사실보다도 부러운 점이 많은 캐릭터였다. 드라마 속 한유주 역시 여자들이라면 모두 동경해 마지 않을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이외에도 그들이 사는 세상 속 주준영, 응답하라 1988 속 바둑기사 최택. 나는 좋아하는 드라마 속에서 나를 설레게 한 캐릭터들을 오래 기억하는 편이다. 그러나 특별히 싫어하거나 정이 안 가는 캐릭터는 없었는데.. 최근에 생겼다. 얼마 전 종영한 '또 오해영' 속 그냥 오해영. 많은 사람들이 예쁜 오해영을 욕할 때 꿋꿋하게 그냥 오해영을 욕했다. 왜냐면? 남자에 목매는 그녀의 순정이,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로 불쾌해서.


  결혼식 전날 애인(태진)은 도경의 오해로 해영(흙)에게 이별선언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밥 먹는게 꼴보기 싫어졌다'는 말로 그녀를 단호하게 밀어낸다. 나락으로 떨어진 태진은 해영을 보내주고, 구치소에 수감된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승승장구 할 뻔 했던 인생이 분처럼 하얗게 흩어졌다. 태진을 애초에 그렇게 되게 한, ㅡ장회장에게도 태진에게 투자한 금액을 회수하게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ㅡ 도경은 해영과 좋아죽는 연애를 한다. '내'가 사랑했던 여인이 '나'를 망하게 한 그 사람을 '때리지만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자존심 때문에 애인에게 이별통보를 한 '나'로 기억한다. 딸의 파혼선언 이후 눈물 마를 날 없는 엄마에게도 미운 꼴 많이 보였다. 도경과 함께 살고 싶다고 떼를 떼를 쓰던 그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집에만 들어와라, 놀아달라, 나 심심하다' 통곡하고 결말쯤에는 도경의 품에 안겨서 '어떻게 이 남자는 내 방으로 안 넘어 올수가 있지?' 같은 소리도 한다. 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도경&해영 커플이 많은 민폐를 끌고 다닌 탓에 나중에는 둘의 사랑에 고개를 젓게 되기도 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앞서 말했듯 해영의 순정이 불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서른 둘의 그녀는 왜 여전히 치열하게 사랑에 목을 매는가. 왜 죽지 못해 사랑하듯 사랑을 앓는가. 해영과 도경을 끌어당긴 운명이 지독했지만, 그 운명을 지독하게 내버려 두는 건 도경에게 목매는 해영인 것만 같아서였다. 같은 감정을 나는 어느새 H에게 느낀다. 해영이 H에게 투과되어 보인다.


  스물 다섯의 H는 서른 둘이 되어도 같은 연애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쏟아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불편한 연애. 하루를 모두 남자에게 맞추고 그렇게 그 시간이 일주일, 한 달을 채워 결국 나에게는 오롯이 남는 것이 없는 연애.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연애. H는 스무살에서 조금도 성숙하지 못한 연애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첫 연애인양, 서투르게.


  "그래서 너 행복해?"

  - 아니..

  " 그런데 너 그 연애를 왜 못 놓는거야?"

  - 내가 남자친구를 너무 좋아해서 힘들어. 조금만 좋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가끔 네가 그런 소리를 할 때마다 답답해. 너는 처음부터 그 남자를 많이 좋아해야겠다고 작정하고 연애를 시작한게 아니야. 너네 관계를 이렇게 만든건 사실 너야. 지나치게 의지하고, 지나치게 외로워하고, 지나치게 혼자 있질 못하고, 지나치게 남자에게 맞추고, 남자가 나오라고 연락 한 통하면 시간이 몇시든 내일 스케줄이 뭐든 앞 뒤 안가리고 샤워부터 하는 너의 그 행동. 거기서 비롯 된 1년이 그 관계를 그렇게 만든거야. 네 감정인데 네가 왜 힘들어해. 네가 주문처럼 자꾸 스스로를 옭아매는거야. 나는 남자친구를 너무 좋아해서 헤어질 수가 없다. 남자친구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이 좋아한다. 그 말들이 다 너를 붙들고 있는거라고. 왜 헤어질 수가 없겠어? 첫 연애 때도, R을 만날때도, 수의사 만날 때도 매번 헤어지는 걸 겁내했지만 헤어졌잖아. 그리고 조금의 텀도 없이 바로 다른 남자를 만났잖아. 네가 겁나는게 남자친구랑 헤어지는 건지, 당장 혼자 있는 게 외로워서인지 구분을 좀 해봐. 그리고 이번에 헤어지게 된다면 네 자신을 혼자 둘 줄도 알아봐. 언제까지 연애하면서 징징거릴거니. 처음이 아니잖아. 다 지나간다는 걸 이제는 알때가 됐잖아."


  미련할 정도로 사랑에 목매는 여자는 대부분 외로움이 많다. 나는 어느덧 그 사실을 간파하는 20대가 되어 있었다.


  - ...우리 스무살 때 같이 연애했던 것 생각난다. 너나 나나 곰신이었을 때. 그때의 우리는 인생에 남자친구만 있는 양 사랑했었잖아. 같은 연애를 지났는데 왜 너는 성장한 느낌일까. 나는 너무나도 그대로고. 나는 혼자 남는게 무서워. 너는 그 사람이랑 헤어지고 힘든 걸 다 겪었었잖아. 나는 한 번도 스스로 이별을 견딘 적이 없어서 그런가봐. 항상 누군가 곁에 있어야만 안심이 돼. 이 사람이 날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것이 영원처럼 느껴져.

  "계산없이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과 앞 뒤 재지 않고 목매는 연애는 달라. 너의 연애에는 지금 네가 없어."


  마치 스무살 언저리에 있는 내게 쏟아 부어내는 듯한 말이었다. 관계가 구질스러워지는 순간 사랑에는 회의가 찾아든다. 나는 지독한 첫 연애를 끝내고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산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주지 않으려고, 너무 많이 의지하지 않으려고, 이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면 남아있어야 할 부분이 온전히 남아있도록. 나를 이렇게 경각시킨 건 역시 X였다. 그 연애를 지나지 않았다면 모를 것들이었다. 스무살이 아닌 나는 이제 안다. 그래서 여전히 어리게 연애하는, 사랑에 목숨거는 ㅡ특히ㅡ 여자를 보면 불편한 감정이 든다. 지나간 연애에서 배운 것이 전혀 없는, 이번 연애 역시 영양가가 없는 연애를 그저 지속하고 있는 H를 보면.


  연애란 개봉한 영화를 함께 봐야 할 사람, 만나서 밥 먹을 사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연애를 하지말고 사랑을 해라. 가장 먼저 너를 사랑해라. 나는 이것을 지난 연애에서 배웠다. 나는 몇시간 째 H와의 전화통을 붙들고 그녀에게 말한다. 그녀는 코가 맹맹한 소리로 '어..잠깐만. 전화가 들어와서.' 하더니 불과 몇시간 전 이별통보를 한 전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며 내 전화를 끊었다. 30분 뒤 카톡하나가 왔다.


  - 오빠가 홧김에 그런 말 해서 미안하댕ㅠㅠ지금 나 만나러 온대 뭐입지!


  시간낭비를 대단하게 했구나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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