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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Jan 27. 2017

밀린 일기

짧은 글

1. 1년 간 살던 자취방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이삿짐을 싸는 것은 익숙하고도 진저리쳐지는 일이었다.


2. 1년의 시간은 나의 짐을 배로 불려주었다. 이사 올 때 썼던 트렁크며 짐가방이 꽉꽉 들어차고도 집은 반도 비워지지 않았다.


3. 종량제 봉투 한 가득 쓰레기가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언젠가 쓸데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안고지고 다니던 짐들을 큰 맘 먹고 덜어냈다.


4. 이 곳에서 잠드는 마지막 밤. 처음 침대에 누웠던 밤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지금의 방은 그 밤과는 조금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다. 아늑하게 낮아진 천장과 벽지까지 스며든 나의 체취와, 내가 좋아하는 디퓨저 향과, 내 편의에 맞춰 어지르듯 배열 된 물건들까지.


5. 새로운 곳과는 금세 친해졌다. 첫 날밤, 낯선 소음으로 잠을 조금 뒤척였으나 다음 날 아침 10시간 이상 푹 자고 일어난 개운한 기분으로 기상을 할 수 있었다.


6. 1월이 거의 지난 지금, 한살 더 먹은 나의 인생은 큰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 새로운 일자리에서 일을 하고, 나를 들뜨게도 화나게도 하는 남자친구와는 여전하고, 작년 내내 끙끙 거렸던 고민들은 여전히 나에게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 기대감에 찼던 나의 새해는 며칠사이 내가 지나 온 지난해들과 다를 바 없는 색채를 띈다.


7.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를 1화부터 곱씹어 보며, 내 삶이 16부작이라면 몇화정도를 흘러왔을 지 생각한다.


8. 남자친구가 곧 이사를 간다. 지금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살고 있는데 조금 많이 멀어진다. 버스 한번으로는 갈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자연히 우리는 의미없이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무의미한 시간들이 쌓여 우리에게 주는 안정감이 함께 줄어들 것이다. 몸이 떨어지는 만큼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해야 한다. 원치 않는 장거리 연애를 앞두고, 우리는 말이 없다. 우리는 서로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을 견디기로 합의한다. 가장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일. 나의 주말이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은 서로의 몫이 되고, 쉽게 달려갈 수 없기에 전화로는 좋은 소리만 하게 될 시간을 나는 알기에 더 씁쓸하다. 내가 지나온 연애에서 그랬거든.


9. 그러나 다를 것이다. '우리가 자주 못 만나도, 나랑 헤어지지 말고 계속 만나줘.' 그는 곧 군대에 가는 20대 극 초반의 그것처럼 내게 말했고 나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 외로울 1년을 약속했다. 우리의 윤택한 미래를 위해서. 나는 20대의 1년을 또 걸어보기로 한다.


10. 나는 그 1년 간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나'를 만들기로 했다. 그와 함께 성장하는 20대를 꿈꾸며 초연해졌다.


11. 우리는 아직 더 자라야 했다. 그 시간이 고독하더라도 견뎌야 했다. 나는 이제 그러함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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