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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Feb 09. 2018

과거의 연애가 남기고 간 것

연애와 사랑은 같지 않으므로.

  사랑은 어떻게 올까. 긴 연애들이 끝나고 난 지금 문득 그런 생각에 닿았다. 연애는 어떻게 시작되는 거였더라. 이전의 연애는 어떻게 시작했더라.


  고등학교 3학년 때 1살 연하의 운동부 남자친구가 있었다. 숙소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주말에만 외출이 가능했고 저녁 10시면 휴대전화를 수거당했었다. 훈련 중에도 역시 연락이 자유롭지는 못했다. 200일간 사귀면서 데이트를 한 기억은 한 두번 내외였던 것 같다. 나도 공부를 해야했고, 남자친구도 바빴다. 첫사랑도 아니고, 친구들이 알고 있는 나의 첫 연애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가끔 그때를 떠올리곤 한다.


  가끔씩은 그 아이가 휴대전화를 빼돌려 밤새 통화를 했다. 내가 잠들때까지 늦도록 문자를 했다. 그런 날이 지난 아침에는 수십통의 문자가 와있기도 했다. 한참 폭탄 문자, 그런게 유행했던 시절이었다. 낯부끄러운 애정을 가득 담은 문자를 밤새 남겨놓는 것. 그럼 나는 눈을 제대로 못뜨고도 행복한 아침을 맞았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약간 무뚝뚝했다. 전라도 출신 특유의 묘한 사투리도 썼었다. 나를 오래 혼자 두는 것을 미안해하며 항상 나를 생각한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 아이와 만날 때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그럴 환경이 아니었음에도, 외로워지지 않았었다. 충실한 애정과 충만한 믿음을 주던 아이였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순간 단호하게 관계를 잘라냈다. 그 아이는 매달리다가 울다가 떠밀려나갔다. 나는 그 관계가 종결되었을 때 조금도 힘들거나 슬프지 않았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련하다. 때론 미안하고, 때론 그립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했고 시시콜콜한 연애담을 겪었다. 나는 여전히 그 아이를 생각하곤 한다. 그 아이는 나를 들뜨게 하고, 설레게 하던 연애 상대였다. 사랑이 아니었다고, 연애랄것도 없는 시간이었다고 치부하곤 했는데 나의 자만이었다. 그 아이가 오래도록 내게 남는 이유는 그 마음이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미안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다음 날 아침부터 운동장을 달려야함에도 졸린 눈으로나마 내 문자에 답장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 나는 그것마저 사랑이 아니었다고 부정할 수는 없어졌다.


  나는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들을 등지고 종종 어이없는 타이밍에 사랑을 느끼곤 했다. 내게 뜨거움을 주는 사람을 찾아, 노련하게 밀고 당기는 그 사람의 속도에 따라, 나는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연인에게 전부를 준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의심한 적이 없다. 왜일까? 단순히 그 연애를 받아들이는 나의 온도 때문이었을까.


  그 아이를 오래도록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연애로 가장 초라해질 때면 그 아이가 나를 꾸짖는 것만 같다. 왜 그런 취급을 받으며 너, 그러고 있냐. 그 사투리에 온 몸이 날카롭게 베여드는 것 같다. 내가 너의 한결같음을 외면하고,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모두 나를 떠났다. 나를 울게하고 매달리게 하던 것들은 시간이 지나자 어처구니 없는 모양새로 낡아졌다. 그러나 너만 생생하다. 너의 기억은 온통 좋은 것으로, 내 정수리를 여전히 빙글빙글 돈다.


  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다. 다시 만나고 싶은 미련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너는 나의 지표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너의 마음이 사랑이었음을. 그러자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프지만, 또 다른 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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