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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Sep 11. 2018

환승이별, 그것도 친구에게

이별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연애란

삶을 지내오며 믿게 된 단어 중 하나는 ‘인과응보’다. 특히 연애에 있어서는 분명하게 작용하는 단어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친구의 애인을 가로채는 것이 일상이던 A가 있었다. A는 같은 방식으로 세 명의 남자친구를 사귀고, 세 명 이상의 친구를 잃었다. 그 과정에서 직장마저 한 번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A는 늘 당당한 입장을 고수했다.
   
- 내가 만나달라고 사정을 했니. 지들이 먼저 좋다고 달려드는 걸 어떻게 해? 내가 받아주기도 전에 이미 헤어지고들 오는데..
   
반은 맞는 이야기였다.
   
A와 A의 친구, A의 친구의 애인이 함께 만나는 자리였고, A에게 반한 남자가 자리가 파하자마자 SNS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후 우연히 장소가 겹쳐 처음 둘만 만나게 되었는데 대화 코드가 잘 맞아 종종 연락하고 지냈단다.
   
그러고도 가끔 커피 한 잔, 밥 한 끼 씩 하다가 맥주 한 잔으로 넘어가던 밤. 친구의 애인은 은근슬쩍 A의 손을 잡았고 A도 싫지 않은 눈치로 깍지를 꼈다. 분위기를 몰아 남자가 “쉬었다 갈까요?”라고 물었다.
   
그 때 A의 대답이 가관이다.
   
- 아니요. 당신은 제 친구의 남자친구잖아요.
   
그 날 밤 A의 친구는 3년 만난 애인에게 문자로 이별을 통보 당했다. 그리고 A와 남자는 나름의 1일을 맞았다.
   
둘은 얼마 만나지 않아 헤어지고, 친한 직장 동료가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는 자리가 생겼다. 비슷한 방식으로 A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 연애를 위해 A는 이직을 해야 했다. 사내에서는 이미 겉잡을수 없는 폭으로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A는 사직서를 제출하면서도 당당했다. A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건 오히려 남자친구를 빼앗긴 직장 동료였다.
   
이직한 곳은 직장동료의 애인, 이제는 A의 애인인 남자가 운영하던 작은 사무실이었는데, 1년도 되지 않아 둘은 헤어졌고 당연히 더는 다닐 수 없게 되었다.
   
그 무렵 몇 남지 않은 A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히 A와 애인이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이 자리 잡혀 있었다.
   
그러던 와중 B는 결혼까지 약속한 남자에게 잠수이별을 당했다.
   
B는 A와 나를 불러내 매일 술을 퍼마시며 울었다. 첫사랑이고 첫 남자였다. 스물 한 살부터 내리 8년을 만났다. 그런 애인에게 잠수이별을 당하다니, 어디서 말하기도 창피하다며 우리 앞에서만 울었다. ㅡA와 나는 B를 통해 만난 지인이었다ㅡ
   
웨딩홀도 알아보고, 결혼 반지 디자인도 하고, 내년에 떠날 신혼여행을 위해 연차를 아끼며 살았는데 정말 뜬금없는 일이었다. 나도 몇 번 만난 적 있는 B의 애인은 성실하고, 능력 있고, 외모까지 준수한 사랑꾼이었기 때문이다.
   
A는 B의 등을 두드렸다. B는 A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었다.
   
그리고 정확히 3개월 뒤, A는 나와 B에게 청첩장을 내밀었다.
   
- 준비가 빨리 되어서, 갑작스럽게 됐어.
   
청첩장에 적힌 김 아무개의 장남 김 아무개.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B는 A의 뺨을 내리쳤다. 그리고 나쁜 년이라던지, 못된 년이라던지.. 수준이 아닌 욕을 한 마디 나지막이 읊조렸다.
   
- XX년.
   
그 욕을 듣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B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견뎠을 시간들.
   
A를 데리러 온 익숙한 승용차의 번호판을 애써 확인하려다 말고 “나 정말 나쁜년이지?” 하며 나를 보며 웃던 그 모든 감정의 집약.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B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B를 따라 일어나려는 나의 팔목을 A가 붙잡았다.
   
- 너라도 꼭 와줘. 부탁해. 나 친구가 별로 없어. 알잖아.
- 나는 B 친구지. 한 번도 네 친구로 너 만난 적 없는데?
   
A의 손이 나의 손목을 빠져나갔다. 고개 숙인 A의 정수리를 내려다 보았다. A의 험담을 하며 멀어지던 친구들 사이에서 꿋꿋이 곁을 지킨 B였다. 왈칵 분노가 차올랐다.
   
그러고 살아서 행복하니? 넌 여전히 당당하니?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모두 삼켰다.
   
- 좋겠다. 청첩장 돌리는 자리에서 XX년 소리 듣게 돼서.
- .......
- 너 언젠가 네가 저지른 일로 가슴 사무치게 우는 날이 올거야.
   
그리고 A는 결혼 한 지 꼭 넉 달 만에 파경을 맞았다.
   
A의 남편ㅡ이자 B의 전애인ㅡ 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B에게 연락을 해 왔다. “자니?”, “잘 지내니?”, “내가 미안했다.”
   
B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연락이 이어졌다. B의 생일에는 직장으로 카드와 꽃바구니를 보내기도 했다.
   
- B, 너만큼 좋은 여자는 세상에 없었어. 내가 바보였어.
   
B가 그 사진을 찍어 A에게 보냈다.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A는 결국 이혼했다. 하객 아르바이트를 동원해 채운 웨딩사진이 무색할 일이었다.
   
B는 씩씩하게 이별을 견뎠다. 실연의 상처로 어여쁘던 볼살을 잃었지만, 20대보다 더 찬란하게 현재를 즐긴다. 전남친과 헤어진 후 20대가 모두 잘려져 나간 것 같아서 허무하다고 울던 B는 애인 없이 지내는 진정한 20대를 만끽하고 있다.
   
A는 돌싱이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녀를 부정할 때에도 곁에 있어주던 친구를 잃었다. 그 것 뿐, A가 얼마나 불행하게 지내고 있다더라...하는 소식은 잘 모르겠다.
   
A의 말이 반은 맞았던 이유는 어떻게 됐든 연인을 외면하고 새로운 사람에게 흔들린 지나간 남자들의 잘못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반뿐인 것은, A가 묵과한 본인의 잘못된 행동이다.
   
그래서 나는 A가 불행할 것임을 안다.
   
조금의 교훈도 얻지 못하고 흘려보낸 연애들로 20대의 마지막이 다가왔기 때문에.
   
좋은 연애였든, 그렇지 않았든 연애는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교훈이 되기도 하고 경험이 되기도 한다. 어떤 흔적은 추억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성장한다.
   
그러나 남의 것을 탐하여 시작된 연애,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낸 연애, 그리하여 실수를 반복하게 하는 연애는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한다.
   
그에 반해 결혼 전 바람기를 알아봐서 다행이라며, A보다 전남친이 더 XX놈이라며 웃을 수 있는 B는 아픈 연애를 딛고 한 뼘 자랐다.
   
아팠던 경험으로 단단히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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