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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May 03. 2020

부부의 세계, 지선우의 짝사랑

그리고 동백꽃 필 무렵

그야말로 열풍(熱風)이다. JTBC의 ‘부부의 세계’는 파격과 격정, 높은 몰입도와 폭풍 전개로 방영 직후부터 드라마 화제성 1위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방영분이 기존 ‘스카이캐슬’이던 비지상파 시청률 1위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총 16부작으로, 12회까지 방영되었으니 드라마는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 셈이다.      


엔딩의 충격(!)을 딛고 마음을 내내 무겁게 짓누르던 감정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이어질 글을 한 문장으로만 요약하자면, <지선우의 가슴 아린 짝사랑>이 될 것이다.     


준영(전진서 분)이가 태오(박해준 분)와 다경(한소희 분)의 집으로 가고, 선우(김희애 분)는 벅찬 이별을 지나는 중이다.     


일을 하면서도 준영이를 떠올린다. 괜히 액자를 들었다 놓고, 밥은 영 먹히질 않는다. 준영 없는 준영이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술 없이는 밤을 지내지 못한다.     


준영이와 비슷한 뒷모습을 보면 하릴없이 쫓게 되고, 다른 이와 웃는 얼굴을 기어이 보고 나자 가슴에 사무친다. 그럼에도 준영이의 시선이 닿을라치면 숨어버린다.     


전형적인 이별 클리셰다.     


그래도 선우는 살아간다. 흐트러지지 않고 출근한다. 밝은 목소리로 준영이에게 전화를 건다. “언제 올거야?”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간절한 말을 건네기도 한다.     


아무도 채워줄 수 없는 공허함을 건너는 선우를 보며, 내가 지난 겨울 사랑했던 동백이가 떠올랐다.     


필구를 보내고 동백씨는 약간... 동백씨 인척 하는 외계인 같아졌다. 연이은 어퍼컷에 지친 동백씨는 어디다 영혼을 떨구고 온 사람처럼 무기력해졌다. 필구의 영역은 내가 한 톨 만큼도 채워줄 수 없었고 울지도 웃지도 않고 만사에 앙꼬 빠진 사람이 됐다.     


필구(김강훈 분)를 종렬(김지석 분)에게 보내고, 동백(공효진 분)이의 일상은 무너졌다. 팔아야 할 만두를 빚을 기분이 아니었고, 개똥을 밟고도 “개똥이 개똥이지...” 해버린다. 그야말로 멘털이 가루가 되어버린 상태.     


선우가 동백이라면, 준영이는 필구다. 그런데 준영이는 왜 필구와 다른 여론을 등에 업고 있을까?      


준영이의 심리를 이해하려면 준영이 나이가 되어야 한다. 엄마가 아빠를 한 번 봐달라고, 이혼하지 않으면 안되냐고 묻는 준영이가 이기적인가?     


열다섯 살의 우리는 모두 미성숙했다. 나 역시도 엄마에게 화를 쏟아내고 뒤돌아 곧바로 후회한 경험이 있다. 엄마가 차려놓은 아침상을 뒤로하고 등교하던 일. 바쁘다는 이유로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은 날들이 있다. 묵묵하게 그런 날을 지나다가 문득 찾아오는 광활한 미안함과 당도할 뿐.     


말라가는 엄마와 아빠에 대한 애증, 일상이 붕괴된 13세(2년 전)의 준영이는 엄마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멋진 엄마와 다정한 아빠에게 충만한 사랑을 받는 완벽한 퍼즐 속 ‘예전의 이준영’으로 살고 싶었던 것.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가 모든 걸 덮어주어야 한다. 열세 살의 시야는 좁기에 불안한 일상을 살아가느라 엄마의 상처와 배신감까지는 살필 겨를이 없다. 엄마를 안아주기엔 제 몫으로 닥쳐진 불행이 암울하리만큼 어두웠다.


뿐만 아니라 필구에게 아빠는 갑자기 똑 떨어진 우박 같은 사람인 반면, 준영이에게 아빠는 따뜻한 기억으로 점철된 존재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저와 유대를 쌓아주던 사람. 견고하고 완벽한 준영이네 성의 든든한 문지기.
 

그런 사람이 엄마를 배신했다. 엄마를 피떡이 되도록 팬 장면을 목도했다. 누나뻘 밖에 되지 않을 여자와 아기를 낳아 고산으로 돌아왔다. 아빠를 미워해야만 하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선우는 준영에게 어떤 엄마였던가.     


JTBC '부부의 세계' 캡쳐
JTBC '부부의 세계' 캡쳐
너 아빠한테 가면 엄마 죽어. 그래도 아빠한테 갈거야? 엄마 죽어도 상관없어 너?     


태오를 향한 배신감에 불타는 선우는 준영도 저와 함께 아빠를 증오해주길 바란다. 나는 너밖에 없고, 네가 없으면 죽는다고 일종의 정서적 학대를 한다.     


그 예민한 나이에 신경정신과로 상담을 받으러 가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물꼬는 윤기가 텄지만 이후에도 직접 병원을 찾아다니던 준영이에게 삶은, 엄마의 맹목적인 사랑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나 밖에 없다고 하는 엄마’가 ‘나만 바라보고 사는 삶’은 준영이를 흔든다. 도벽을 앓고, 추문에 시달리는 엄마를 겪고, 친구와 멱살을 잡는다.     


엄마가 제발 ‘다른 엄마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엄마가 평범하지 못한 이유는 나 때문이구나.     


KBS '동백꽃 필 무렵' 캡쳐
너 왜 이렇게 홀딱 타? 엄마 안아주지도 않고 갈거야?
 - 내가 애기야?     


JTBC '부부의 세계' 캡쳐
준영아 가기전에 잠깐 얘기 좀 하자. 엄마 좀 봐봐. 응?
- (태오에게) 됐어. 그냥 빨리 가.


그래서 태오에게로 간다. 그러나 그 가정의 일원이 될 생각은 없다. 엄마에 대한 의리다.     


아빠를 향한 애증, 엄마에 대한 연민 사이를 줄타며 필요한 만큼의 대화만을 하며 지낸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하게 숨기고 지낸다. 그렇게 고립된다. 가장 외로워진다. 아마도 준영이는 엄마가 살려면, 엄마를 외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서서 먹는 컵라면 위로, 남이 차려준 밥상 위로 엄마가 떠오른다.


때론 숨이 막히게 답답하고, 때론 미치게 불쌍한 나의 곳. 나의 고향. 나의 엄마.     


선우와 준영은 어긋난 오해를 하며 서로를 그리워한다.     


준영이가 태오네 가족에 겉도는 동안, 선우는 준영이 짐을 챙기며 보낼 준비를 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준영’이를 위해서. 준영이의 선택이 그랬듯.     


글 서두에 이 글을 앞서 한 문장으로 요약했지만 한 문장을 덧붙여 두 문장으로 다시 요약하자면, 지선우의 가슴 아린 짝사랑. 그리고 이준영의 서툰 짝사랑쯤이 되었을 것이다.     


선우와 준영은 서로를 서툴고 아리게 사랑하고 있다. 그 사랑의 방식이 달라 서로에게 올곧게 닿지 못하는 중.


13회 예고를 보며 남은 4회 동안, 나는 준영이 때문에 또 한참을 먹먹하겠구나 싶어졌다. 그 아이가 겪어야 하는 세계가 잔인해서.     


KBS '동백꽃 필 무렵' 캡쳐
필구는 잘 섞이지 못하고 있다. 반이 바뀔때마다 항상 민망하고 조마조마하던 나처럼... 필구도 작은 가슴이 긴장하고 있다. 필구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진다. 필구는 나를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나를 닮는다. 자꾸 눈치를 보고 자꾸 그늘이 생긴다.     


응달이 짙어지는 준영의 열다섯. 시멘트가 굳기도 전에 헤집어진 준영의 가슴. 가엾고 딱한 작은 어깨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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