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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May 06. 2020

사랑이 전부인 사람

'적당한 연애'가 있을까

나는 늘 중간 만큼의 밥벌이를 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에 큰 의욕이 없었다. 중학생 때 일찌감치 한국식 교육에 회의감을 느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중상위권의 성적은 늘 유지했다. 어렵지 않게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졸업을 1학기 남겨두고 취업에 성공했다. 괜찮은 직장에서 적당한 열의로 일했다. 역시 불행인지 다행인지 일머리가 좋아서 동기보다 일찍 대리를 달았다. 급여일을 주기로 안정적인 삶의 루틴을 꾸려나가게 됐다.


학업도, 일도 늘 내게 그 정도의 영향을 가졌다. 중간은 아무도 다치지 않는 숫자. 가장 안전한 곳. 나의 세계에선 중간이 가장 좋은 것이었다.


퇴근 후에도 해가 아물지 않은 초여름의 저녁, 버스에 앉아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바쁜 걸음과 치열한 삶의 무게들을 손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 많은 인파, 이 중 몇몇은 직장이 끝나자마자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으로 달려간다. 누군가는 오후의 바톤을 이어받아 이제부터 뜨거운 하루를 시작할 예정이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잠도 잊고 2일 치의 하루를 봇짐으로 인 채 살아내고 있다.


나의 대학 동기 중 하나는 수험시절에 3일 연속으로 코피를 터뜨려 본 적이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 또 나보다 대리를 한 기수 늦게 단 동기는 야근 후 새벽 이슬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묘한 희열이 든다고 했다.


그들이 치열하게 온 순간으로 나는 너무 평온하게 걸어온 것이 아닌가. 다들 어쩌면 저렇게 뜨거운 온도로 살아가고 있을까? 펄펄 끓는 서울에서 나는 36.5℃. 오직 나만 그렇게 살고있는 것 같다.


그러면 막연하게 공허해지곤 한다. 내 잠을, 내 집중을 온전히 쏟을 수 있는 무언가. 나는 왜 그 무언가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을까. 그러다 곱씹어본다. 내가 가장 몰두했던 시절, 계산하지 않고 덤벼들었던 일에 대해서.


나는 사랑에 열심인 사람이었다.


나의 삶을 이루고 있는 것은 모두 중간이면 되었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간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가장 예민한 눈두덩이로 살아졌다. 하루 온종일 참 성실하게도 했다.


나는 첫사랑과 5년간 연애했다. 5년 동안 한 사람에게만 몰두하며 지냈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서 밤새도록 전화를 끊지 않았다. 10분이라도 얼굴을 보려고 1시간 넘게 치장하고, 왕복 2시간 거리를 향했었다.

 

그 사람이 군대에 가 있을 때는 그야말로 매주 면회를 갔다. 매일 1시간 이상 콜렉트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이후로도 나는 데이트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했고, 밥을 먹고 나면 짐짓 물러나 있는 그에게 익숙해졌다.

   

어느덧 그보다 그를 더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이미 마음이 끝나버린 그 사람을 그 사람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새로운 사랑에 빠져버린 내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일은 퍽 고된 일이었다.

   

이별은 사랑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지독했다. 그 지독한 시간을 간신히 걸어 나와서는 태연히 또 사랑에 빠졌다. 두 번째 연애도, 세 번째 연애도 나에게는 그 사람과 하는 첫 번째 사랑이었다. 첫사랑처럼 더운 열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모두 나를 떠났다. 나는 태초에 그러했듯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혼자로서의 삶이 익숙해졌다.


홀로 있을 때 완전한 사람이 연애도 현명하게 해낸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사랑에 빠진다 해도 이번 연애가 지나온 연애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지난 연인 중 두 사람은 환승이별을 했다. 내가 꼿꼿이 서서 저만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나는 그 시선을 묵인하다가, 혼자 상처받다가, 이내 지쳐 떨어져 나갔다가, 돌연 걷어차이곤 했다.


나에게서 자존심이 모두 도려져 나간 것 같은 시간. 그 더딘 시간을 지나고도 나는 여전히 맹목적이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목을 맨다. 내 인생에서는 사랑이 가장 뜨겁고, 가장 어렵다. 여전히 가장 갈망하지만, 가장 부족하다.


늘 나 혼자 갈망하고, 늘 나 혼자 간절한 사랑. ‘적당히’가 안되는 연애.


모든 사랑이 지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현재의 나는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면 조금도 채워지지 않는 나. 다음 사랑도 태풍처럼 나를 헤집고 가리라 짐작하면서도 기어이 사랑에 빠져버릴 나. 지겹고 애틋하고 안쓰러운 나.


나는 왜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할까. 사랑에만 빠지면 주체가 되지 않을까.


연애도 초연하게 중간만큼만 해내고 싶다. 어쩌면 무던하게, 조금 싱겁다고 느낄 정도로 건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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