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과 연애
갓 스물둘이던 내가 약학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못 미더워하던 남자친구 표정에 순간 기가 죽었던 기억이 있다. 네가 할 수 있겠냐고, 이미 너무 늦었다고.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아보니 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나는 결국 도전도 하기 전에 포기를 서둘렀다.
돌아보니 그때의 나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도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 몸서리치도록 미련이 남는 건 아니지만, 문득 문득 그 때 공부라도 해봤으면 어땠을까 싶어지곤 했다. 약사가 됐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잠시간 내 꿈이기도 했던 기억이 가스라이팅으로 점철돼 있는 게 형편없이 느껴졌다.
쪽방촌을 전전하는 무연고자의 기획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국민일보 191224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14693) 열악한 고시원이나 여인숙 등을 전전하며 사는 빈곤한 사람들은 정부 보조금 금액 만큼의 인생을 산다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기초수급비가 70만 원이라면 30만 원은 방세로 내고, 하루에 1만 원씩을 소비하며 산다. 이는 양반이다. 방세를 내자마자 남은 금액을 1주도 안 돼 술로 탕진하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국가가 주는 금액에 본인의 인생을 맞춰 사는 것. 이렇게 살다 보면 빈곤에서 벗어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나는 이 사회적 현상이 연애와 닮아있다고 느꼈다. 모자라는 줄도, 다른 방식으로 채워 넣을 줄도 모르고 상대가 배급하는 양만큼의 사랑을 받으며 그것으로 안주하는 삶.
연애는 한 사람의 세계관을 쉽게 흔들어 놓는다. 어릴 때 한 연애일수록, 첫 연애일수록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에 나는 남자친구가 만들어준 프레임에 갇혀 지냈다. 그가 허락하는 만큼의 사고를 하고, 그와 싸우지 않을 만큼만 다른 관계를 유지했다. 그 과정에서 비단 서두에 적은 약학대학 말고도 다양한 모양의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그는 나보다 3살이 많았는데 20대 초반이던 나에게 그 나이 차이는 우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인생 선배라는 명목으로, 남자친구라는 이유로 내 인생에 함부로 간섭하도록 내버려 뒀다.
그러나 그게 무색하게도 그는 꼭 연애 3년 만에 이별을 통보했다.
원래 이별이 그런 거야. 아무것도 안 남아. 너는 처음이라서 유난히 힘들 거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하던 사이에 남는 것이 알량한 미련과 치기 어린 증오. 이런 것뿐인 게 당연하다니. 그 와중에 또 모든 것을 다 견딘 어른인 양 나의 슬픔을 넘겨짚는 그 때문에 분통이 터질 것 같았다.
이별은 서럽고, 뜨겁고, 우울하게 몰아쳤다. 그 폭풍우를 견디며 그의 꿈을 자주 꿨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꿈. 나는 그에게 한없이 모질게 굴 수 있었다. 그는 내게 매달리고, 지치지 않고, 사랑을 갈구한다. 나만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는 내게 쉽게 사과하고 나는 더 쉽게 토라져 버린다. 더 쉽게 이별을 말한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당신을 손쉽게 외면하는 꿈을 꾼다. 헤어지자고 한마디만을 하고 편하게 돌아서는 나의 뒷모습을 그가 멀찍이서 오래 보고 있는 꿈.
그가 떠났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저 그에게 잔인하게 구는 꿈을 꿨다. 나를 살게하던 연애가 이렇듯 애증으로 종결됐다.
날씨는 사실 기분 같은 것이어서 이만 됐다고, 그를 놓아주자고 한 밤 초연해지다가도 이내 아쉬운 마음으로 파도가 친다. 나의 잘못을 곱씹고 자책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용서를 구해볼까 고민한다. 사실은 그렇게 많은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연애가 나의 인생에 얼만큼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던가 생각한다. 어쩌면 나를 자라게 했을 연애.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순간도 더러 있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을 나의 또 다른 스물둘 보다는 아름다운 구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만나지 않았어야 좋을 사랑도 있다고 생각하면... 씁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