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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안키친 Jan 15. 2023

다시 쓰는 가족에 대한 정의

오히려 최첨단 가족을 읽고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수년 전부터 간혹 목도하던 단어다. 어느 정도의 호기심을 늘 간직하고 있다가 관련된 책을 기웃거렸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읽게 된 책이다. 


1인 가구의 급증, 비혼이나 졸혼 등 결혼에 대한 전통적인 고정관념들에 균열이 가고 이제는 그 단단해 보이던 통념이 이전보다는 많이 말랑말랑해 진 것을 감지할 때쯤, 함께 등장했던 가족의 새로운 정의들. 낯설게만 느낄 게 아니라 이제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인정해야 할 때다. 이혼의 급증과 동시에 생겨나는 재혼가족의 증가, 그리고 새로운 갈등들도 이제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갈등이 없어 보이는 가족은 많아도 갈등이 없는 가족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보수적인 가족문화

를 당연시 하며 평범하게 자랐지만, 청소년기 으레 치르는 사춘기나 성격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의 갈등과 다툼, 미움과 증오 등의 감정을 겪으며 살아왔다. 


지금에 와서야 아문 상처들이지만, 때로는 평생을 아물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도 있다는 걸 얼마 전 친구를 통해 알았다. 친구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내가 알았던 학창시절의 그이 보다 더 잘 사는 것 같다는 생각에, 나보다 한 수위의 주부 내공과 엄마 내공을 가진 듯 하여 부러워했다. 하지만 미처 몰랐다. 결혼 전 가족 안에서 극심한 스트레스가 있었음을. 그리고 아직까지 친정에 갈 때마다 비슷한 갈등 상황이 벌어져 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내가 결혼을 일찍 했더라면 나 또한 갈등의 대상이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조금 소원해 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았다. 내가 아버지를 어느 시기부터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두둔할 때도 가끔 생기면서(그 전까지 두둔의 대상은 엄마였지만) 결혼이 생각보다 늦어지면서, 은퇴 즈음 작아져만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해 갔던 거 같다. 


그리고 40대 중반 뜻하지 않게 겪었던 수술과 후유증, 재활을 견디며 내 아버지가 40대 후반 고혈압으로 쓰러지면서 후유증으로 한쪽 몸이 마비되어 피땀 흘리며 재활했던 시절이 뼈저리게 공감됐다. 옆에서 피땀 흘려 간호해준 엄마의 덕분도 있지만, 질병이라는 불행을 겪어보니 본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크기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다. 내 아버지는 그런 지경의 몸을 이끌고 재활을 해내고 이후 20여 년을 더 직장생활을 이어가셨다. 


아프고 나서 이제 고작 1년 정도 더 직장생활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의 그 끝에서 나의 아버지를 만났다. 한없이 작아지는 자존감을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한 척 남들 앞에 선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가장이라고 남자라고 내색도 못하고 속으로 얼마나 힘드셨을지, 아마 내가 이런 아픈 경험을 안했다면 죽을 때까지 모를 일이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불행을 겪지 않은 가족들은 당연히 모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오히려 최첨담 가족>의 저자 또한 남들이 보기엔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가정 불화가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각자는 지극히 모범적이었다. 가정 불화의 원인은 불행한 가정에 흔히 등장하는 가정폭력, 사업실패 등의 문제가 아니라 훌륭한 4인 가족을 만들기 위해 각자 해왔던 ‘헌신’에 있었다. 공부든 돈 버는 것이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학생은 공부만 잘하면 되고, 어른은 남에게 손 벌리지 않을 정도로 돈만 잘 벌면 된다는 것이 사회적 계약이었다. 가족 안에서는 스스로와 서로에게 부여하는 기준이 완벽 이상으로 높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바라다가 서로를 미워했다. 불행의 이유가 자본주의 정신을 충실하게 반영하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오히려 최첨단 가족'(박혜윤 저) 중-

이런 생각은 요즘 대다수의 가족들의 가치관과도 동일하다. 부모는 남부럽지 않게 살기 위해, 

자녀 교육을 위해 뼈빠지게 돈을 벌고, 자녀들은 그런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자 성적과 

점수에 목을 매면서, 그 모든 스트레스를 옆에 있는 가족들에 서로 쏟아붓는 식이다. 자기가 

희생한 만큼 상대에게도 과도한 희생을 요구할 지경에 이른다면 결말은 행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4인 가족 안에서 원시시대 부족들의 정서상태를 가지길 바라며 실험을 했다. 가족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가능하게 만드는 소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이런 사회가 주지 못하는 원시적 부족민으로서의 소속감을 제공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부모는 자식 부양의 의무를 다하는 댓가로, 아이들은 상위권에 들기 위해 성적을 올리는 식의 거래가 아닌, 자유로우나 충성스러운 원주민과 같은 공동체 말이다.
-'오히려 최첨단 가족'(박혜윤 저) 중-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던 나로서는 아주 신선한 발상이었다. 게다가 전통적인 가족관이 자본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 또한 흥미롭다. 그래서 가족이 일종의 쉐어하우스 안에서 함께 사는 쉐어메이트 같은 존재로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함께하기 위해 해야할 최소한의 일들, 즉 청소나 요리 등만 협력하고 최소한의 윤리 도덕적 수칙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관계인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면 기꺼이 도울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부담을 주지 않는 관계.  


과거 회사 동료 한 명이 떠올랐다. 그 동료의 부모님은 자녀들이 독립하고 난 후 여가를 즐기며 살기 바쁘다고, 어릴 적부터 맛있는 게 있으면 부모님이 먼저 먹고 자녀들은 두 번째 였다고 하면서 보통 부모님이랑 성향이 다르다는 것이다. 결혼 후 아이 없이 지내는 본인 부부에게도 별다른 터치가 없다면서. 헌신적이기 보다는 각자의 인생을 최우선으로 두고 집중하는 듯 보였다. 서로 헌신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자리에서는 특이하다 거나 쿨하다, 멋지다 등의 리액션을 보이고 말았지만 어쩌면 그냥 지나칠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동료 또한 캐릭터가 매우 닮은 것 같았다. 회사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스트레스에 굴하지 않고 그저 월급만 제대로 들어오면 된다고 정신 승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모나거나 직원들과 어울리지 못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보이긴 했다. 


책 속에서 저자가 가족 안에서 정한 규칙 중 하나가 서로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기’다. 좋은 행동도 나쁜 행동도 구분하지 않고 그 사람 자체가 그런 걸로 여긴다. 칭찬할 일도 없겠지만 싸울 일도 없을 것 같다. 얼마 전 서울대 병원 김붕년 교수가 방송에서 했던 ‘자식을 우리 집에 온 귀한 손님처럼 여겨라’는 말과도 연결되는 생각이다. 


나도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즈음부터 매달리던 모바일 게임 때문에 실로 지난한 전쟁을 펼치던 때가 있었다. 갈등과 싸움, 폭언과 폭행이 오가기도 했다. 병원이나 센터를 찾아 상담을 받기도 했고, 책에 매달려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 초등 아들 두 명과 함께 보내고 있는 이번 겨울 방학중에도 한번씩 단전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화를 누르며 생각한다. ‘이건 지옥이다. 인생이 이처럼 비참한 건가’라고. 


우리 부부 또한 전통적인 가족관, 즉 우리의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과 비슷한 가족관을 가지고 살다보니 헌신한다고 생각하고 자식에게도 헌신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벌이를 하고 살림을 하는 헌신, 아이들에게는 올바른 인성과 어느 정도의 학습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훈육(또는 강요)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정신력이 나날이 고갈된다. 나뭇잎이 좀 먹어 구멍이 숭숭 뚫리듯 그렇게 멘탈이 손상되어 간다. 

“너도 나중에 너 같은 자식 낳아봐야 알지!” 라며 보복성(?)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과연 내 아이가 커서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기 바라냐고 물으면, 사실은 아니다.


1971년생인 큰 언니 나이를 감안하면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키우던 시절은 50년도 더 전이다.

그리고 내 아이가 자라서 가정을 꾸리는 나이를 대략 30세 정도라고 치면, 그 땐 2041년, 그러니까 거의 70년쯤 세월이 흐른 뒤다. 그 때 우리 아이가 좀 더 합리적인 방식으로 건강한 가족생활을 해 나가길 바란다면 지금의 나부터 변화해야 할 것이다. 조금씩 그러나 꾸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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