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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안키친 Nov 24. 2021

세상에 둘도 없는 나의 이모님

10년차 워킹맘 홀로서기

첫째의 돌잔치는 서울 강남의 모 호텔에서 나름 성대하게 치렀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주변에서 도움을 준 가족은 물론 회사 상사와 선후배들도 초대해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화이트 원피스를 차려입고 헤어메이크업까지 곱게하고
드디어 '엄마의 한말씀'시간이 되었다.

잔뜩 폼잡고 인사를 시작하려는데, 그만 눈물이 터져버렸다.그것도 우아하게 또르르 흐르는 눈물이면 좋았으련만 너무 볼품없게 꺼이꺼이 하며 숨넘어가듯 울어제꼈다.

보통은 아이를 키워보니 부모님 마음을 알게되서라든지, 1년동안 고생한 생각이 스친다던지 하는 이유인데 나는 좀 달랐다.

첫째가 6개월무렵부터 돌봐주신 베이비시터 이모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감정이 북받쳐 혼자서 눈물바다를 만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7년간 종일 봐주신 나의 첫 이모님. 우리이모님은 세상 둘도 없는 나의 은인이다.


이모님은 친손주만큼 아이를 잘 키워주신 건 물론,
일하랴 애키우랴 고생한다면서 나에게 늘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함께한 세월이 긴만큼 개인적인 아픔도 알게되었고. 가족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었던 지라 일을 그만두신 요즘도
경조사를 챙기고 있다.





둘째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도 이모님이 가장 강력한 ‘믿는구석’이었다.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2주동안 있으면서 4살배기 첫째를 돌봐주신 것도 이모님이었다.


하루는 이모님이 산후조리원 있는동안 본인이 집에 안가고 큰 아이랑 같이 지내도 되겠냐고 물어보셨다.나는 반갑게 괜찮다고,오히려 감사한 일이라며 편하게 지내시라 말씀드렸다. 알고보니, 남편과 불화가 있어서 집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다고 하셨다.


이모님은 고부갈등이 심한 편이었고, 소위 말하는 '효자남편'때문에 속이 시커멓게 탄다는 얘길 자주 하셨었다.공무원출신인 남편이 퇴직 후 이모님과 상의 없이 덜컥 사업을 시작했다가 빈털터리가 됐고,경제력 없는 남편 도움 없이

아이 셋을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본인이 가장으로 일하시면서 보낸 분이었다.


그럼에도 남편의 멸시와 시어머니의 온갖 구박을 견디며 꿋꿋히 살아오셨다. 우리집에서 아이들을 봐 주실 때도 종종 갈등을 못견디고 힘들어 하시곤 했다.


둘째가 태어나고 두 아이를 봐주시던 어느날, 이모님은 마음이 너무 힘들다며 내게 털어놓으셨다.


다른 건 몰라도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있다면서 그럴 때마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생각도 해봤다고.


순간 이모님에 대한 연민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행여 우리 아이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주는 건 아닐까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이모님을 도울 방법이 절실했다.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해 드리고 싶었다. 나는 그냥 내가 그동안 이모님에게 고마운 점들을 솔직하게 메세지로 보내드렸다.


이모님이 저희 아이들을 잘 봐주시는 덕분에 제가 이렇게 회사 계속 다니면서 아이들도 키울 수 있어요. 항상 아이들 예뻐해 주시고 제 살림도 많이 도와주시는 이모님이 저에겐 꼭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에요.이모님이 정말 진심을 다해 일해주시는 모습에 감명받아서, 저도 회사에 가서 더 열심히 하게 된답니다. 이모님은 정말 따뜻하시고 능력도 많으시고 배울 점도 많으신 분이에요.   


나의 응원이 힘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모님 집안사정은 다행히 점차 좋아지셨다.그 후로도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우리 집에서 베이비시터 일을 처음 시작하신 이모님은 그만두신지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본격적인 베이비시터로 몸값을 올리며 맹활약 하고 계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 돌보랴 살림하시랴 바쁘실텐데도 아직도 아이들 생일이나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선물과 간식을 한아름 안고 우리집까지 찾아와 주신다.


그 날도 오랜만에 오신 이모님과 얘기 와중에 내가 "이모님, 명절 때 친정어머니께는 다녀오셨어요? " 물으니,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잖아"하시는 거다. 너무 놀라고 동시에 조의를 표하지 못한게 죄송스러워 눈물이 났다.

이모님에게 요양원에 계신 친정어머니가 늘 마음아픈 존재라는 걸 알았기에 그냥 반사적으로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었다.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모님에게 소중한 분이기에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한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소중하게 기억되는 것, 그래서 그 또한 나를 소중한 사람의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해주는 것은 아름답게 이어지는 인연의 타래와 같다.


이모님은 첫째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무렵, 우리집 일을 그만두시기로 했다.나도 나지만 아이들이 가족같이 여겼던 이모를 잊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눈물로 보내드린 기억이 난다.


예상보다 자주 연락해 주시고 찾아와 주셔서 아이들도 너무 좋아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모님이 그만두시고 나니, 그동안 육아 외에 도와주시던 청소, 빨래 등의 살림들이 지진해일 몰려오듯 모두 내 몫이 되어버렸다. <싸울때마다 투명해진다(은유 지음)>에서 나온 말처럼 살림이란 드넓은 바다에서 걸레질을 하는 것과 같았다.


이모님이 그만두시고 얼마되지 않아 몇 번 금요일 퇴근후에 우리집에 오셔서 하룻밤을 아이들과 주무시고 가신 적이 있었다.

나의 고충을 짐작하셨는지 남편과 영화라도 보고 오라고 해주셔서 덕분에 심야영화 데이트를 즐긴적도 있다.


이후 2년동안은 새 이모님이 아이들의 오후 하원과 저녁을 챙겨주셔서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모님의 도움으로 유지해온 워킹맘 8년만에 나는 살림 독립을 시작했고, 10년만에는 육아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몇년 전 인상깊게 읽었던 <77년생 엄마 황순유(황순유 지음)>라는 책에 방송 진행자이자 세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인 저자가 만났던 어느 이모님에 대한 미담이 있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꼭 나의 미담제조기 같은 이모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오늘 그 꿈을 이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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