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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안키친 Jan 17. 2022

양화대교 말고 ‘노량대교’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께


나의 아버지는 80년대 한강의 기적(?)에 일조하신 산업역군이었다.


대학에서 토목학을 전공하신 아버지는 20대 후반부터 굴지의 건설회사에 다니셨다. 40대 후반 갑작스럽게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기 전까지 나름 20여년 잘나가는 샐러리맨으로 한 회사에서 승승장구 하셨다.


아버지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한강의 수많은 대교 중 하나인 ‘노량대교’를 지은 일이다.  1987년에 완공된 한강의 노량대교의 건설 당시, 아버지는 현장 소장업무를 맡으셨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도 제법 큰 이벤트 중 하나로 기억된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었다면 1987년은 아버지의 노량대교가 완공된 해였다.


다리가 모두 지어진 다음 아버지는 엄마와 딸넷을 현장으로 데리고 가 주셨다. 노량대교의 머릿돌 앞에서 찍었던

기념사진이 있어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나는 것 같다.


“이게 아빠가 지은 다리란다.”

올망졸망한 어린 딸들에게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듯 설명하셨다. 그 땐 너무 어려서 별로 큰 감흥은 없었지만,

이후 ‘노량대교’는 우리가족에게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상징적 이름이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항상 빛나는 훈장 같다고나 할까. (실제로 아버지의 집에는 아직 그 당시 받은 국무총리 표창장이 걸려있다)


건설회사에서 주로 일하신 아버지는 80년대 초반 중동 사우디에도 몇년간 파견 근무를 가셨었다. 내가 5살 때쯤의 일이다.


그 당시 엄마는 가족들이 보내는 음성편지를 하나의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 만리타국에 떨어져 있는 아버지에게 보내셨다. 음성 편지는 훗날 카세트 테이프를 듣던 시절까지만 해도 가끔 온 가족이 모여 듣곤 했는데, 아기 때 내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참 묘했던 기억이 난다. 휴대폰이 없던 어릴적에는 사진도 영상도 참 귀했으니까.


아버지가 사우디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 캐리어가 뒤바뀌는 웃지못할 사고가 있었다. 당시 아버지의 짐이 가득담긴 캐리어와 아마도 외국인이였을 누군가의 캐리어가방이 바뀌는 바람에 우리 자매들은 고전 클래식 음악에 어느정도(?) 조예가 깊어졌다.


중동에서 뒤바뀐 캐리어 안에는 모차르트부터 베토벤까지 고전 클래식 교향곡 카세트 테이프들이 가득했다. 노란 테이프 위 검정색 영문으로 빼곡하게 쓰여진 클래식 테이프들은 항상 우리집 거실에 있던 오디오 전축 선반위에서 위엄을 자랑하는 존재였다.


어릴 적 수많은 클래식 음악 테이프 세트가 아버지가 출장에서 사온 선물인줄로만 알던 시절,아버지는 가끔

 “이게 말이야. 아빠가 클래식을 좋아해서 전부 산거지!”

라며 농담을 하신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 덕에 나와 언니들은 어딜 가도 바흐부터 모차르트나 베토벤, 쇼팽까지 유명한 곡 정도는 아는 척을 하는 수준이 되었다.


음원의 디지털 시대가 열리고 그 많던 카세트 테이프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에 얽힌 추억만큼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건강을 잃고 한동안 몸이 불편하셨지만, 엄마의 지극한 간호와 당신의 굳건한 의지로 건강을 회복하셨다. 이후로도 막내딸이 결혼할 때까지도 직장생활을 계속하셨다.


아버지의 타고난 부지런함과 근면성실함, 철두철미한 성격이 어렸을 땐 숨막힐 정도로 버겁고 싫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부모가 되고 나니,  그것만큼 위대한 유산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상살이가 버거울 때가 많았다. 나는 네 딸중에 가장 아버지 유전자를 덜 물려받은 편이지만, 아버지 덕에 어디 나가서 제법 ‘똑 부러진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학창시절 언니들보다 한참 부족한 성적표를 들고와도

다음 번엔 더 잘하라며 묵묵히 나를 믿어주셨던 아버지,

애써 들어간 회사가 대수롭지 않은 곳이라도

“어디서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한 것”이라고

응원해 주신 나의 아버지. 자식을 키워보니 이 또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이 된다.


살면서 가장 감사했던 순간은 어느날 문득, 나를 믿어주는 아버지와 어머니 덕에 ‘자존감 강한 사람’이 됐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자식을 키우면서 나는 부모님께 받은 것의 절반만큼도 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늘 고민이 된다.


결혼 전 부부동반 일본여행을 한번 보내드린 것 외엔, 남부러운 효도한번 못해본 딸이라 늘 죄송할 따름이다.


그나마 요즘은 막내딸이 집에 갈 때마다 엄마와 함께 스마트폰에서 처리할 일을 빠짐없이 물어봐 주셔서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는 게 다행이다.


앞으로 더는 아프지 말고 행복하시길,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께 이 글을 바친다.


*사진출처 : 나무위키(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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