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abled :Epilogue 2
한 해가 끝나가는 12월이 되자,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어쩐지 해가 바뀌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지 싶어 마지막으로 D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진료를 보고 성대필러 시술이 가능하다면 할까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대기자들이 넘쳐나고 환자들은 진료실에 들어가서 2분도 채 안돼 나오기를 반복했다. 대학병원의 흔한풍경을 또다시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나도 들어가면 몇마디 못하고 나오겠지.. 괜히 왔나?’
하지만 의사쌤을 만나고 보니 생각이 180도 달라졌다. 우선 병명을 말하고 수술기록지를 의사쌤에게 건넸더니, 자세히 읽어내려가며 질문을 했다. 타병원에서 수술하고 생긴 합병증을 같은 병원에서 치료하는게 일반적일텐데
다른 병원까지 온 내 속내를 한번에 알아챈 듯했다.
캐주얼하게 예시를 들어가며 쉽게 설명해준 덕분에 남몰래 느끼는 후회의 감정들까지 조금 치유된 것 같았다.
“수술한 병원에서는 뭐라고 안해요?”
“성대필러 시술 얘기하는데, 저는 좀 불안해서..”
“환자분 수술한 종양이 신경종이라 신경손상이 불가피했을 거에요. 저도 논문이나 수술장에서 보면 대개 그런 경우는 그렇더라고요”
누가 수술했어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이야기다. 합병증 때문에 내가 수술한 병원을 불신한다는 걸 안다는 듯한 말이었다. 그 말로 인해 내가 품고 있던 후회와 원망 서린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 졌다. 처음 만났지만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느낌을 받으니 한층 더 신뢰가 갔다.
그렇게 해서 나는 D병원 의사쌤에게 성대 필러 시술을 받기로 했다. 경우에 따라 전신마취와 입원이 필요하기도 한데, 다행히 국소마취로 할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한결 편했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남편과 함께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쌤은 전공의로 보이는 쌤과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쌤은 남편을 보자 내시경 화면을 같이 보면서 다시 전반적인 설명을 해줬다. 시술 방법과 효과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해줬다.
“수술하고 1년 될 때까지는 희망을 갖고 기다려볼 수 있어요.”
대수롭지 않지만 내가 그토록 듣고싶던 말을 그가 해줬다.잔잔한 감동이 밀려와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도 같았다. 그는 역시 의술을 넘어 마음까지 치유하는 낭만닥터가 맞았다.
드디어 목에 마취주사를 놓고 코와 목구멍 안쪽에도 스프레이로 마취를 했다. 마취가 되는 동안 바깥에서 잠시 대기하면서도 아프면 어쩌나 상상하니 두려웠다.
다행히 시술할 때는 통증없이 내시경 화면을 같이 지켜보면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여차하면 전신마취에 입원까지 각오하고 있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역시 두려움은 실제 닥칠 때보다 상상할 때 더 큰것 같다.
시술 직후 감사인사를 하고싶었지만 하루동안은 말을 하면 안되서 인사도 못하고 돌아왔다.
가장 큰 건 성대마비를 앓게 된 것, 회사를 다시 휴직하면서 전업맘이 된 것이다. 잔뜩 심란해진 감정들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바닥으로 곤두박칠 친 적도 있었다. 합병증에 대한 트라우마로 성대필러시술을 한참 망설이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성대마비는 보통 1년까지 기다려보고 확진을 한다고 한다. 평소같으면 내 성정상 더 기다려 봤을텐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성대마비가 낫기만을 기다리면서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바라만 보고 있자니, 내 자신이 너무 무력해 보였다.
더이상 위험할까봐 피하기만 해서는 안된다.시술이든 뭐든 해보자!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주로 신중한 편이었다. 생각이 많은 대신 실행은 느렸다. 장점이자 단점이 될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두 세가지 옵션이 있고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는 막바로 부디치기 보다는 안전하게 우회하는 쪽을 선택했던 것 같다.
이제부터는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정면돌파해 직진하는 인생을 살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변수도 많겠지만 목적지까지 좀 더 빠르게 도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정면돌파하는 직진인생, 안되면 다른길로 빠르게 바꿔서 다시 직진해 보기로 한다. 나는 두 아이를 책임질 엄마니까! 머뭇거리기에 할일은 많고 시간은 짧으니까!
필러시술을 받는 짧은 시간동안 목소리를 되찾기를 간절히 기도했고, 통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런 생각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그동안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기 걸렸나봐요’ ‘목이 왜 그렇게 쉬셨어요?’’뭐라고요??’ 등의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많았다.그런 질문이 거듭될수록 무뎌질 법도 한 감정은 조금씩 소모되고 있었다.
사정을 아는 지인들에게도 민폐였던 건 마찬가지다. 내 목소리가 알아듣기 힘들지만, 내가 행여나 상처받을까 귀기울여주고 잘 안들리면 오히려 미안해 하는 모습을 보는 건 나에게도 고역이었다.
수술 전과 똑같아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일상에서 나와 주변사람들이 불편하지만 않은 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 목소리를 잃게되면서 아픔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됐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의 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됐다.
인생에서 없어도 좋았을 뼈아픈 경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겪어보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지나갈 또 하나의 세계를 알게됐다.그만큼 넓은 세계를 무대로 넓은 사고로 살 수 있다는 건 어찌보면 축복일 것이다.
(이미지 출처 : www.pinterest.co.kr)
디스에이블드(Disabled) 시리즈의 마지막 편입니다. 1-10화는 브런치 북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