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지막 형제에게
구정 명절이 다가온다.
종잡을 수 없이 계속되는 코로나 시국에 명절의 의미도 퇴색되는 것 같다.
해가 바뀌면 가장 부담스러운 것 중 하나는 나이세기다. 내 나이를 한살 올려 떠올리다가 유감스러운 마음에 이내 잊기를 수년 째 하고 있다.
그렇게 올라가지만 올리고 싶지 않아 잊어버리는 건 부모님의 나이도 마찬가지다.
올해도 부모님 나이를 기억하려고 계산기를 열어 2022에서 아버지의 출생년도를 뺐다. 와, 탄성이 절로 나오는 78세시다. 어머니는 4살 더 아래시니 74세. 휴.. 마음이 묵직하다.
아버지 어머니의 형제분들은 대부분 돌아가셔서 이제 아버지의 아우, 즉 작은 아버지만 계신다.
어머니에겐 언니가 두분, 오빠가 한 분이 계셨다. 나이차이가 위로 10년 터울씩 나는 언니들이어서 이모들을 만나면 막내동생인 엄마를 항상 귀하게 여기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 가족은 외갓집에 자주 왕래하던 편은 아니었지만, 한 두번 여름방학 때 강원도 평창에 거주하셨던 큰 이모네 놀러갔던 적이 있었다. 큰이모는 엄마보다 20살은 더 많아 엄마에겐 엄마같은 언니였다.
어느 자리엔가에서 엄마와 큰이모가 작별하시는 모습도 기억이 난다. 큰이모가 사시는 곳도 멀고 연세도 많으셔서인지 두분은 헤어지면서 곧잘 눈물을 흘리시곤 했다. 어린마음에 나는 속으로 ‘나도 나중에 나이가 들면 언니들과 헤어지면서 눈물지을까?’ 생각했었다.
작은이모는 나를 만날 때마다 엄마를 많이 닮았다며 예뻐해 주셨다. 2년 전쯤 엄마와 함께 이모 댁에 병문안을 갔었다. 병세가 완연한 이모의 모습을 뵈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병환중이셨던 이모는 내가 엄마 옆에 있는 것도 헤어질 때가 되서야 알아보셨다. 그리고 늘 그렇듯 ‘얘는 ㅇㅇ를 닮아 이뻐~” 라고 말해주셨다.
와줘서 고맙다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배웅해 주실 때 이모는 웃고 계셨지만 나는 괜스레 눈물이 났었다.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고장난 수돗꼭지 마냥 눈물이 흘렀던 날이었다. 그리고 두달 뒤쯤 작은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모가 돌아가셨데ㅠ.ㅠ”
평온한 오전 날아든 카톡을 보고 점심준비에 분주하던 손길을 멈췄다.한창 휘젓다가 만 프라이팬을 멀끔히 바라보다가 불길을 줄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상태가 많이 안좋으시다는 말에 예상하고 있었지만,병세를 툭툭 털고 일어나시길 모두 바랐는데. 그렇게 이모는 여든 두번째 여름 생의 줄을 놓으셨다.
의연해 보이던 엄마는 장례식장에 들어서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울음을 터트렸다.영정사진 앞에서 무장해제 된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자식들 앞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던 모습이다. 고생만 하다 떠난 언니를 보내며 아쉬움과 서러움이 폭발한 것 같다.
엄마에게 이모는 마지막 남은 형제였다.부모가 돌아가시고 형제마저 세상을 등지면 홀로 남은 것 같은 외로움이 밀려들 것 같다.
나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다행히 아직 건강하신 편이지만 해가 갈수록 올라가는 나이에 늘 걱정이 앞선다.
시대가 바뀌고 명절이 주는 상징적 의미도 작아졌지만, 그만큼 떨어져 있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은 커져만 가는 것 같다.
오늘은 부모님과 함께 강원도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에게 구정 선물로 과일 택배를 보내고 왔다. 아버지는 고향에 있는 아우네 집에 보낼 과일을 손수 고르고 택배를 부치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당신 나이를 세며 동생의 나이도 세어보시고는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보내시진 않았을까?
휴대폰으로는 전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온기가 택배와 함께 전해지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