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첫째 아들을 핑계삼아 육아휴직을 했다. 휴직을 기다리는 내 머릿속에는 아이 입학 준비에 대한 일이 두 개 쯤 떠올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여덟 개 쯤 떠올랐다. 둘째출산휴가 때 삼개월 남짓 쉰 것이 내 마지막 자유시간이었으니, 4년간 나를 위한 시간 없이 나를 제외한 사람들을 위한 시간만 가득했던 셈이다.
휴직 후 첫째 달:: 벅차오르는 기대감으로 설렜다.
아침에는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은 등교, 등원했다. 늘 북적거리던 우리집에 휑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생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몸의 긴장이 풀리며 나른한 기분이들었다. 미리 계획했던대로 아이들을 등교시키자마자 운동을 했다. 한시간 운동을 하고 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렸다. 나를 위한 책 한 권, 아이들을 위한 책 몇 권을 빌리다 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집으로 가면 학교를 마친 첫째가 돌아왔다. 한시간정도 집에서 간식을 먹고 첫째는 다시 학원을 갔다. 집안일을 조금 하다보면 둘째가 올 시간이 돌아왔다.운동, 도서관, 나와 가족을 위한 시간들로 반복되는하루하루는 아름다웠다.
아이들이 필요한 순간에 엄마가 집에 있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아이의 간식을 챙기는 일은 나름대로 뿌듯한 일이었다. 가끔은 일터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그래서 더 매일 아침이 기뻤다. '와, 어제도 쉬었는데, 오늘도 쉬어? 남들 일하고 있는 시간에??' 하는 생각이 들면 슬몃 웃음이 나기도 했다. 조금은 어리둥절하게, 조금은 바쁘게, 조금은 설레게, 첫째 달이 끝났다.
휴직 후 둘째 달:: 왜인지 모를 무기력이 찾아왔다.
밀려있던 집 정리가 얼추 끝났다. 선반 위 묵은 먼지는 한번씩은 쓸고 지나갔다.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여유를 즐기려는 내 발목을 잡은 것은 하나는 무기력, 하나는 후회였다.
무기력은 이유도 없이 찾아왔다. 슬슬 소파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끔은 침대에 누워서 시간을 죽이기도 했다. 오전 두시간, 오후 두시간. 오롯이 혼자일수 있는 4시간은 뉴스나 가십란을 슬쩍 보다보면 지나갔다. 나랑 전혀 관련없는 어떤 사람이 어떤 소송을 했는지,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 살아갈 연예인은 어떤 곤경에 처했는지, 시덥잖은 활자들을 눈에 채워넣는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는 데도 체력은 축났다. 눈도 침침하고 어깨도 아프고 손목도 시렸다. 한참만에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둘러본 집은 난장판에다가 이제 곧 아이들 올시간.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스트레스 해소 겸 남편보기 미안한 마음 지울 겸 더 휴대전화에 매달렸다. 휴대전화를 끼고 있을 수록 기분은 처졌고,처진 기분을 풀려고 더 휴대전화를 끼고 살았다. 악순환이었다.
무기력의 친구가 짜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럴려고 휴직했나. 가족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저녁은 대체 뭘 먹나. 장난감은 또 언제 정리하나. 스트레스와 부끄러움에 남편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에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에게도 여유롭게 웃어줄 수가 없었다. 잘못한 건 나 하나인데, 남편과 아이 둘, 세 사람에게 짜증을 냈다. 하루 종일 하는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아이들 등교준비 30분, 운동 1시간, 저녁식사시간 1시간이 전부였다. 하루 종일 휴대폰만 들여다 봐서 이제 새로운 소식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저녁을 먹이고 나면 또 휴대폰을 붙들었다.
정말 이상했다. 그렇게 바라던 휴직인데, 무기력과 짜증으로 얼룩진 하루라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주말은 왔다 가고, 다시 월요일이 왔다.무기력과 스트레스의 악순환은 어느새 두번 째 달을 잡아먹고 세번 째 달도 잡아먹었다.
휴직 후 셋째 달:: 인생 속 후회의 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후회도 이유 하나 없이, 개연성 하나 없이 나타났다. 괜히 십 년 전, 이십 년 전, 그 옛날 마음에 걸렸던 것까지 다 끄집어내 다시 고민하며 자책을 했다. 기억력이 좋은 편도 아니면서 그 옛날의 내 난감한 상황이나 그때의 기분 같은 것들은 잊지도 못했나 보다. 당시의 내 존재를 무시하는 것 같았던 말 들이나 가시처럼 나를 깎아 내렸던 표정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자려고 누우면 머릿속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듯 싫었던 기억들이 휘몰아쳤다. 자연스럽게도 잠을 자지 못하는 시간들이 길어져 갔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 밖에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잠을 설친 다음 날은 역시나 피곤하고 더더욱 무기력해졌다.
이상하게도 가위에 눌린 것처럼 자꾸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데도 머릿 속은 다 지나간 후회로 어지러웠다.일주일 전에 있었던 일의 후회라면 다시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라도 해보겠는데, 몇년이나 지난 일들이 자꾸만 떠오르니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조차 없었다. 그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나를 나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책망하는 것 뿐이었다. 사실은 나도 안다. 그게 그 당시의 최선이었고, 내 나름대로의 최대한의 노력을 다 해서 살아왔고, 살면서 사고처럼 벌어지는 그런 실수나 후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지금의 나도 알고, 그때 그 후회로 가득찬 번민덩어리인 그때의 나도 안다. 그런데도 정말 딱 가위에 눌린 것처럼, 미로에 빠진 것처럼 그 지점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휴직 후 넷째 달:: 무작정 집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전설의 고향 속 장화홍련이 생각났다. 혹시 이 과거의 귀신들이 내가 자신들의 자꾸 잊고 부정하려고 하니까 더 나한테 달라붙는 뭐 그런건가. 사또들이 장화홍련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혼자 지레 겁먹어서 정신을 잃은 것처럼 나도 괜히 생각만 해도 불쾌한 기억들이라서 들여다 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지우려고 하지 말고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볼까. 물론 다 지난 일이지만, 그래도 뭐가 원인이었는지 그때 당시의 내 최선은 뭐였을지, 만약 그때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생각해 볼까. 뭐 지금 생각하고 나 혼자 결심한다고 해서 어느 하나 달라지거나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 장화홍련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마음으로,지극정성으로 내 옛날 일을 생각해 보자.
집 안은 위험해. 내가 무기력하게 휴대전화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감시역을 붙이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누가 보고 있어야 집중하는 스타일인가보다. 대학수학능력검정시험을 치를 때도, 자격증시험공부를 할 때도, 집에서는 공부가 안됐다. 도서관에 가서 다른 사람 눈치 봐가면서 해야 집중을 잘 했던 것 같다. 혼자 집에서 있을 때는 소파에 누워 있어도 날 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더 무쓸모한 하루를 보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도 가고 도서관도 가고 가끔은 공원으로 나갔다. 다행히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과거의 후회들을 자꾸 들여다보니 그때의 내가 최선을 다했음을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도 생겼고, 집 밖으로 나가다 보니 집안에서 있는 시간들도 짧아졌고 무기력한 시간들도 짧아졌다.
휴직 후 다섯째, 여섯째 달::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두 가지를 시작했다. 내 몸과 내 마음. 두가지로 나누어 계획을 세웠다.
내 몸을위해서 새벽걷기를 시작하자. 원래 휴직과 동시에 매일 하던 필라테스로는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마침 새벽잠이 없어진 것도 도움이 되었다. 알람 없이도 어스름한 새벽에 눈을 뜨는 내 몸을 밖으로 데려갔다. 폐 속까지 차오르는 상쾌한 공기와 저녁 노을보다 더 아름다운 아침 노을은 아침 걷기가 나에게 주는 커다란 보상이었다. 아이들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출 필요 없이 내 마음대로 속도를 내서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예상밖의 희열이었다. 매일 보던 선명한 낮 동안의 풍경과는 다르게 어스름하고 흐릿한 아침 공원과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초록과 풍경은 마치 혼자 떠나는 여행같았다. 나는 늘 스스로를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시시한 아침보다는 화려하고 신나는 저녁이 더 즐겁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조금 빠르게 걸으면서 만나는 아침은 감동적일만큼 상쾌했고 자유로웠다.
내 마음을 위해 기록을 시작하자. 다이어리 쓰기는 스무살 때부터 시작했다. 기록을 하면서 나는 지금의 즐거운 일을 잊지 않기를 바랐고, 미래에 다가올 일을 대비하기를 바랐었다. 할 일이 쌓인 날에는 다이어리에 할 일 리스트를 적어두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다이어리에 적어 둔 순서대로만, 딱 그만큼만 애쓰면 금방 끝날 것 같은 그런 안도감 말이다. 복잡해진 내 마음을 위해 글을 써보기로 했다. 다이어리는 한달 후, 또는 일년 후 처럼 비교적 가까운 미래를 위한 도구라면, 더 먼 미래는 어떨까? 내 마음속에 가득한 걱정과 고민 중 십년 후, 아이들의 육아가 끝난 후, 내가 열심히 살아낸 후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라면 이건 어떤 글로 기록하면 좋을까.
지금 내가 이 글을 적는 이유가 바로 이 고민에 대한 해답이다. 일차적으로는 여기 브런치에 적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정리되는 효과가 있다. 이차적으로는 나중에 정지블리가 자라서 지금의 나처럼 육아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여섯번의 한 달이 끝났다.
첫째 한 달.
- 휴직 동안 다른 돈 될 만한 부업을 찾아 쭈욱 쉬고 싶었다.
- 아이는 아침에 학교 보내면 두세시간 뒤 다시 돌아왔다.
- 아직은 휴직했다는 실감이 안났다.
- 일단 제일 하고 싶었던 운동센터를 매일 매일 다녔다.
두번째 한달.
-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아무 생산성이 없는 일만 하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 낮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지내고 나면, 저녁에 돌아온 아이들에게도 기쁜 태도를 할 수가 없었다.
- 괜히 그 옛날 마음에 걸렸던 것까지 다 끄집어내 다시 고민하며 자책했다. 마음 속 가라앉았던 찌꺼기들이 다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세번째 한달.
- 두달째 아이들 등교준비, 저녁준비, 운동 1시간 외에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 무기력의 친구가 짜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직장동료를 만났을 뿐인데 회사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복직할 때까지 만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월요병이 없어졌음을 알고 새삼 놀랐다.
- 대신 금요병이 생겼다. 주말에는 남편도 아이들도 다 나와 한몸이다.
네번째 한달.
- 집 안에서는 아무래도 안되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 누구든지 날 감시해야 뭐라도 되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 운동센터로, 도서관으로, 카페로 일단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나도 나갔다.
다섯번째 한달.
- 두 가지를 정했다. 나의 몸과 나의 정신.
- 나의 몸을 위해서 배우던 필라테스 외에 걷기를 추가했다. 새벽 걷기는 혼자 떠나는 여행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나의 정신을 위해 글을 쓰는 일을 시작했다. 쓰고 나면, 머리에서는 그 생각을 지우기로 했다.
여섯번째 한달.
- 복직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어쩌면 두번째, 세번째 달의 무기력과 후회 덕에 네번째, 다섯번째, 여섯번째 달이 좀 더 알차고 건강해졌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너무 바빠서 나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제 때 하지 못하고 쌓아두었다가, 휴직으로 인해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갑자기 터져나온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