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좋겠다. 나도 저렇게 근심걱정 없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한 적이 있었다. 햇살을 가득 담은 맑은 눈동자와 때묻지 않은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면 아이들은 세상만사 힘든 일은 모른 채로 마음이 평온할 것만 같다고 지레 짐작하곤 했었다.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목이 똑 부러질까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며 '한들한들 예쁘다' 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타인의 시선이었던 건 아닐까. '난 스트레스 받고 힘들지만 이건 다 자식인 너를 위해서야, 그러니 넌 스트레스 없이 괜찮지?' 하고 나 편한대로 생각한 건 아닐까. 아이들은 정말 근심걱정이 없을까. 스트레스는 어른들의 전유물일까.
아이들의 월요병
6살 둘째 지블리는 어른들의 단어를 귀담아 듣고 자신의 언어에 잘 활용하는 편이다. 어느 월요일 아침, 아이들을 깨우려고 토닥거리고 있었다.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뒹굴뒹굴 구르던 둘째가 첫째에게 속삭였다.
"형아, 월요일이 또 왔어. 아, 스트레스 받는다."
귀여우면서도 짠했다. 나와 남편이 받는 월요병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아이들의 월요병은 생각지도 못했다. 듣고 보니, 아이들도 정말 스트레스 받을만 했다. 집에서는 뒹굴뒹굴 구를 수도 있고 장난감도 다 내 차지인데, 유치원에서는 적은 장난감으로 아이들과 나누어 놀아야 했다. 집에서는 좋아하는 반찬으로만 식탁이 차려지는데, 유치원에서는 식판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없을 수도 있다.
어른인나도 자라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온갖 월요일에 가야 하는 곳은 언제나 가기 싫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가기 싫어서 땅만 보고 학교를 느릿느릿 걸어가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저 어른이 되고 보니 그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어서, 또는 예전 일은 희미해져서 괜찮았겠거니 생각했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아이들도 정말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있겠구나 싶었다.
아이들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실 아이와 함께 하는 하루는 순탄치만은 않다. 아이가 밥 먹는 것에 집중하지 않을 때, 치카치카하러 가라고 이야기했는데도 못들은 척 할 때, 아직 못 읽은 책을 다 읽고 싶다고 투정부리는데 유치원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형아랑 놀다가 의견이 안맞아서 서로 사나운 눈빛이 오갈 때. 준엄한 판사이자 문제해결자로서 엄마인 나는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문제의 당사자인 아이들의 스트레스에 관해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엄마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저 한 순간 개입하고 다시 뒤돌아 설 테지만, 형제간의 관계는 그리스신화, 흥부놀부 등 고전에서도 비중있게 다루는 때로는 첨예한 갈등관계가 아니던가. 천진하고 마냥 웃음이 많은 아이라 하더라도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은 있다. 아이도 어른도 예외일 수 없다. 어쩌면 엄마 뱃속에서부터 어쩌면 죽을 때까지, 스트레스는 있다. 누구에게나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은 있다. 어른들보다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아직 스트레스를 어떻게 다룰지 모르는 아이들 세계에서는 꽤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아이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스트레스는 화르륵 타오르는 불과 비슷하다. 잘 사용하면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지만,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우리 삶의 재앙이 된다. 불은 산천초목을 불태울 만큼 위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불을 이용하여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따뜻하게 공기를 데우기도 한다. 인류가 불을 다루는 방법처럼 스트레스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접근하면 어떨까.
첫 번째 방법은 '불씨를 없애는' 예방적 관점이다. 아이가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애초에 스트레스를 받을만한 상황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아이들이 힘들어 할만한 상황을 모두 없애 줄 수는 없다. 다만 스트레스 상황에 대해 미리 설명해주고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 한 것 만으로 아이들의 불안과 스트레스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상황을 예측해 보는 것 만으로도 스트레스는 아이 스스로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다. 부모의 역할은 스트레스의 양과 크기를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줄여주는 것이다.
큰 아이 정블리는 주로 낯선 상황, 낯선 사람에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편이다. 크면서 나아지기는 하지만 지금도 학교나 학원같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기간에는 미리 선생님과 상의하고 아이와 함께 미리 방문하여 장소에 대한 낯설음을 낮추어 주는 등 신경을 쓰는 편이다. 작은 아이 지블리는 mz세대의 화두인 '공정'에 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형아는 사탕 두 개 먹고 나는 하나 먹어? 왜 아빠는 영상보고 나는 못 보게 해?' 지블리에게는 특히 음식을 나누어 주기 전에 원래 몇개였는지 미리 보여주고 형아와 어떻게 나누었는지 설명해 준다. 아빠에게는 미안하지만 숨어서 영상을 보든지 아니면 아이들이 보는 시간에 영상을 보는 쪽으로 조정한다. 스트레스 상황을 아예 줄이는 것이 첫번째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소화기 사용법을 익히는' 상황해결적 관점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소화기도 챙겨두고, 뿌릴 물도 챙겨보고, 이것저것 챙기는 것처럼,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구비해 두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 교감신경계의 작용으로 맥박이 빨라지고 혈압이 올라간다. 순발력있는 행동에는 도움이 되지만,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마음을 토닥이며 진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심호흡을 할 수도 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나를 반성하지 않는다. 내가 잘못해서 이런 상황이 된 것이 아니다. 아이 스스로 '뭐, 괜찮아.' 라고 생각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부모가 옆에서 대신 말해줄 수 있다. 커가면서는 부모가 자신에게 해 줬던 것처럼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기분 전환이다. 문제를 그대로 두고 산책을 하거나 노래를 들을 수도 있다. 둘째 지블리는 화가 나면 작은 초콜릿같은 달달구리를 먹고 마음을 추스른다. 일단 달달구리가 입에 들어가면 기분이 풀리면서 엄마가 하는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고 자신의 속마음도 쉽게 보여준다.
동물의 왕 사자도 사냥에 실패할 때가 있대.
첫째 정블리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신을 비난하며 발을 구르기도 한다. 정블리는 종이접기를 정말 잘 하고 자부심이 있다. 하루는 미니카 종이접기를 하다가 실수를 했다. 발을 쾅쾅 구르며 어쩔 줄을 모르다가
"나는 돼지야. 나는 똥꼬야."
하고 말하며 나를 슬쩍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살펴본다. 열심히 접던 미니카가 망가져서 속상하고 다시 접기는 힘들어서 그런 것 같다고 가설을 세웠다. 나를 슬쩍 바라본 것은 엄마에게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을 낮잡아 비난해서 '내가 못나서 이런 일이 벌어진거야' 하고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당화를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아이가 힘들어 하는 상황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맞다면 엄마의 진심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아이는 위로 받는다.
"정블리가 정말 열심히 접고 있었는데, 속상했겠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도 떨어질 때가 있고, 동물의 왕 사자도 사냥에 실패할 때가 있대. 누구나 실수는 하는거야. 그럴 수 있어. 정블리가 돼지똥꼬라서 실수한 건 아니야. 엄마가 제일 사랑하는 정블리는 돼지똥꼬가 아니고 엄마의 보물상자야. 이리와. 엄마랑 기분을 좀 풀고 다시 접어볼까? 일단 기분부터 풀어볼까?"
아마 대뜸 "나쁜 말 하면 못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부모도 아이를 사랑한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어렸을 때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어른에게 들은 말이 저런 식이라서 반사적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현재 상황을 내가 공감하고 있고, 아이를 위로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진실되게 보여주는 것 만으로 아이는 스스로 스트레스감옥에서 문을 열고 빠져나올 수 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말은 안돼.
위의 두 가지 방법에는 기본 전제가 있다. 스트레스를 받는 자체가 아이가 혼날 일은 아니라는 것. 스트레스를 받으면 누구나 조금 공격적이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스트레스에 힘겨워 하는 아이에게 혼까지 내서 더 스트레스를 줄 필요는 없다. 스트레스는 누구나 받으며,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데는 적절한 방식이 있다는 것. 이 사실을 몰랐던 아이에게 그저 알려주면 된다. 꾸준히, 지치지 않고 설명해주면 된다.
물론 잘못된 행동은 알려주는게 맞다. 아무리 화가 나도 좋지 못한 말은 삼가야 한다. 아무리 화가 나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는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공감이 먼저다. 짧게 공감, 짧게 교정. 자세한 부연 설명은 아이의 마음이 풀리고, 스트레스 감옥에서 빠져나온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아이들도 안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조금 어긋났다는 것을. 스트레스를 받아 조금 사나워졌다는 것을. 조금 차분해진 아이에게 설명해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한다. 아이에게 시간을 주자.
아이들은 이번 생이 처음이라,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기 스스로를 때리거나 다른 사람을 때리기도 한다. 부모들도 이번 생이 처음이라, 자해를 하는 아이를 발견하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놀라움과 걱정이 앞선다. 어른인 나조차도 정말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나도 모르는 이상 행동을 발견하곤 한다. '그럴 수 있어.' 라고 토닥이며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면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는데, 옆으로 지나가는 흰머리 지긋한 여성분들이 인간관계에 대한 염증을 토로하고 있었다. 공자님 말씀으로는 50세에 하늘의 뜻을 알고(지천명), 60세에 들리는 말의 이치를 깨닫고(이순), 70세에 하고 싶은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않게(종심)된다고 했다. 그런데 내 주변을 돌아보니 나이가 몇인지에 상관없이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환갑을 넘은 우리 어머니도 가끔 스트레스를 받아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칠순을 앞둔 아버지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종종 삐지신다. 나 뿐만 아니라, 내 아이들도 평생을 스트레스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인생의 평생 친구 스트레스를 무턱대고 싫어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줄 것인가, 스트레스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적절히 다룰 줄도 알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알려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