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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에는 끝이 있다 Jul 15. 2022

아이 키우기 2단계 "사랑은 말로 해야 안다"

- 누구나 아이를 사랑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제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엄마는 나 안사랑해?


  혼난 뒤의 아이는 꼭 이렇게 물어왔다. 아이는 내가 바라지 않는 순간에도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아이와 한바탕 한 뒤의 지친 나에게 꼭 물어온다. 약간은 새침하게, 또 조금은 절박하게.


엄마는 언제나 널 사랑해.


  엄마는 아이를 늘 사랑한다. 하지만 가끔은 말하고 싶지 않다. 꼭 연인과 싸우고 난 뒤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다르다. 엄마랑 기싸움을 벌이고 난 후의 싸한 분위기를 느낀 아이는 엄마에게 어떤 식으로든 애정을 확인받고 싶다. 평소에는 없을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엄마는 나 안사랑해?"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운이 빠진 상태에서는 아이의 애교나 사랑표현도 달갑지가 않다. 엄마도 사람인지라 아이를 훈육하고 나면, 기분이 쳐지고 만감이 교차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하다. 사실은 언제나 내 아이를 사랑하지만, 훈육하고 난 뒤 바로 잘 해주면 왠지 안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훈육의 효과가 떨어질 것 같다. 그럴 때는 사랑을 표현하지 않아도 될까?

  아이는 불안하다. "우리 엄마가 내 행동과 내 존재가 별개라는 것을 알고, 내 존재는 사랑하지만, 내 행동을 바꾸어 주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현명하게 생각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어른인 나조차도 누군가에게 훈계를 들으면 일단은 기분이 나쁘다. 내게 도움이 되고 말고는 그 다음 문제다. 어린 아이는 오죽할까. 엄마의 달라진 말투, 달라진 표정을 느낀 아이는 평소의 사랑스러운 엄마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혼나는 상황 자체가 불안하다. 그래서 아이는 최선을 다해 평소라면 하지 않을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엄마 입장에서는 평소보다 더 신난 아이를 보며 훈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든다. 더 엄하게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또 어떤 아이는 엄마에게 사랑표현을 요구하고 가끔은 울기도 한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나를 신경쓰는 것 같으면 울음은 더 커진다. 왠지 모르는 척 하고 싶다. 울음소리를 못들은 척 하면 아이가 다시 평소로 돌아올 것 같다. 이때 엄마가 못들은 척 한 것은 울음소리가 아니라 아이의 불안한 마음이다. 엄마가 날 싫어하는 것 같고 내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그 불안한 마음을 모른 척 하는 것이다.


훈육 효과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아이를 혼낸 뒤 바로 예뻐해준다고 해서, 바로 전의 훈육의 효과가 떨어지거나 엄마가 오락가락 제멋대로라고 오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 입장에서는 훈육 후 보상같은 애정 표현이 이 다음 훈육을 좀 더 의연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아직 세상이 서툰 아이는 예측 가능한 상황을 선호한다. 지금 훈육 뒤에 더 심한 일이 벌어질지, 엄마가 당분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지, 곧 나를 다시 안아줄 지 미리 경험해보아서 알고 있으면 훨씬 상황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지난번에 엄마가 나를 혼냈는데, 그 다음에 나를 사랑한다고 표현해 줬어.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혼내는 건 아니야.'

  아이가 불안한 상태가 되면 훈육 효과는 떨어진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아이를 불안하게 한다. 훈육하는 과정을 아이가 일정하게 예측할 수 있게 하면, 아이도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엄마도 조금 더 편하게 훈육할 수 있다. "잘못 지적, 옳은 행동으로 선택지 주기, 마음 다독여주기" 순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잘못 지적에서만 끝나면 아이가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옳은 행동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하면 아이의 자율성과 상황판단력을 길러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애정을 표현하며 마음을 다독여주면 혼낸다는 것이 엄마가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아이의 자존감이 다치지 않을 수 있다.

  훈육은 서로 주고 받으면서 확실한 효과를 낸다. 훈육한다는 것은 아이를 일방적으로 혼낸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엄마 혼자 아이에게 말을 쏟아내고 돌아서 버리면, 그건 훈육이 아니라 잔소리다. 효과도 없고 의미도 없다. 아이 스스로 부정적인 인식만 생기고 자존감만 낮아질 뿐이다. 그 행동이 잘못된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고, 아이에게 공을 넘겨야 한다. 가능한 선택지를 두세 개 제시하여 아이가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엄마조차도 힘들 땐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지?


  훈육은 혼나는 아이도 힘들지만, 혼을 내는 엄마도 힘들다. 순간적으로 화가 파르르 나는 것을 적절히 조절하고 그러면서도 단호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나면, 잠시간 혼자있고 싶은 생각도 든다. 이제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거의 다 됐다. 이제 아이의 불안을 다독이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 아이가 엄마 혼자만의 시간을 이해해 줄거야." 하고 엄마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된다. 화가 덜 풀린 표정으로 억지로 사랑한다고 말해봤자, 아이들은 다 안다. 

  엄마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일단 엄마의 마음을 풀자. 나는 아이의 정수리 냄새를 좋아한다. 폭신폭신한 아이 손바닥도 좋아한다. 글씨를 아는 첫째 아이에게는 손바닥에 글씨를 써준다. 글씨를 모르는 둘째 아이에게는 손바닥에 하트를 그려준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짦은 몇초 동안 나도 아이도 촉감에 집중하게 되면서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린다. 손바닥을 맞대기 전보다 훨씬 더 표정이 누그러진다. 그 이후에는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평소에도 넘치는 애정을 줬는데, 꼭 혼난 뒤에도 줘야 할까?


  내가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순간은 언제나 아이가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순간과 같은 순간일까. 언제든 엄마가 사랑을 표현해 주면 아이는 기꺼이 마음을 받아서 저금통처럼 사랑을 쌓아 둘까. 그렇게 평소에 사랑을 많이 채우면 조금 혼나도 아이의 마음이 괜찮은 걸까. 과연 그럴까.

  아이가 책상에 다소곳이 앉아서 색칠에 열중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그 순간 열심히 엉덩이 두드려 주고 쓰다듬으며 사랑을 표현해 준다. 아이는 기뻤을까. 내 사랑을 저금통에 땡그랑 저축했을까. 집중해서 색칠하고 있는 순간에 조금은 귀찮지 않았을까. 집중력이 흐트러지지는 않았을까. 내가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순간에 사랑해줬다고 해서 아이는 충분히 사랑받았다고 느낄까.

  사랑표현은 아이가 원하는 순간 필요한 것이다. 꽃다발은 한껏 예쁘게 포장되었지만 결국은 죽은 꽃이다. 내가 향기맡고 싶을 때 향기 맡고, 내가 보고 싶을 때 예뻐하면 그만이다. 그 꽃의 반응을 살필 필요가 없다. 생명을 키울 때는 그렇지 않다. 강아지를 키울 때는 내가 누군가와 싸우고 왔어도 때가 되면 밥을 줘야 하고, 화분을 키울 때는 내가 퇴직을 당했어도 물때가 되면 물을 준다. 아이와 함께 하는 날들이 매번 행복으로 가득차지는 않다. 가끔은 엄마로서도 지치고 직장인으로서도 지치고 아내로서도 지치는 날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이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사랑을 표현하는게 맞다.

  내 경우에는 특히 아침 출근 직전 시간이 그렇다. 어제도 힘들었고, 오늘도 힘듦이 예상되는 그런 날 아침, 밖에는 카풀하는 분이 곧 오실 시간이다. 평소에는 혼자서도 잘 신던 양말을 아이가 신겨달라고 보챈다. 원래대로라면 아이가 스스로 옷을 입는 동안에 나는 아이들 물통에 물을 싸서 가방에 넣어주어야 한다. 별것 아니지만, 좋은 표정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참을 수 있다. 곧 끝난다. 우리는 지금 현관 앞에 있다. 신발을 각자 신고 마스크를 스스로 챙기고 나면 웃으며 헤어질 수 있다. 라고 생각한 순간 마스크를 서로 먼저 꺼내겠다고 두 형제가 서로 불퉁대기 시작한다. 아무나 먼저 꺼내면 어때서! 나한테는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마스크 꺼내는 순서때문에 시간이 틱톡틱톡 대는 듯한 환청이 들린다.

  내일도 이런 날이 반복될 것이다. 참기 힘든 순간이지만 참아 낸다. 그저 현관문을 먼저 열고 내가 먼저 나간다. 쿨하게 "엄마 엘리베이터 앞에 있을게."라고 말한다. 엄마가 먼저 나갔다는 생각에 형제는 서로 기분 나빴던 일은 잊고 서둘러 걸어 나온다. 그리고는 엄마 마음이 풀리기도 전에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장난을 치며 형제는 웃고 있다. 나만 아까 그 현관문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생각한다. 뭐가 문제일까. 아이들이 먼저 마스크를 꺼내고 싶어 하는건 어떻게 보면 그냥 별거 아닌 본능같은 마음이다. 우리도 가끔 앞서 가는 사람보다 먼저 걸어가서 엘리베이터에 먼저 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만약 내일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떨까. 아무래도 견딜 수 없다면 해결 방법을 찾으면 된다. 나는 그날 저녁에 신발장 왼쪽 문과 오른쪽 문으로 마스크 저장 공간을 바꾸었다. 위치를 바꾸기만 했는데도 형제는 즐거워 한다. 아이들에게는 놀이처럼 느껴지나보다. 아침에 상황이 험악해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한 가지 줄였다. 최소한 수많은 날 중 하루 정도는 무난하게 출근하겠지 싶다.

  매일 밤 아이들과 하는 일이 있다. "엄마의 보물은 누구지?" "우리" "엄마의 사탕은 누구지?" "우리" "엄마의 우주는 누구지?" "우리" "엄마의 선물상자 누구지?" "우리" "엄마의 햇님달님 누구지?" "우리" 누구 하나가 그만하고 싶어질 때까지 세상 소중한 건 다 가져다 붙인다. 소싯적 노래방에서 간주부분 랩하던 운율을 가져다 붙이면 엄마는 꽤나 만족스러운 놀이가 된다. 맨 앞 질문으로 돌아가, 울 것 같은 얼굴로 혼나고 난 둘째가 묻는다. "엄마는 나 안사랑해?" "지블리야, 엄마의 보물은 누구지?" "우리" "엄마는 지블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혼낸게 아니야. 엄마는 지블리를 너무 사랑해서 지블리랑 즐겁게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지블리가 오늘 조금 힘들었지? 그렇지만 배울 건 배워야 해. 오늘 배울 건 끝났네. 이제 엄마랑 재밌게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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