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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바 Dec 11. 2021

후회하지 않는 메뉴 선택법

    오랜만에 큰 서점에 가고 싶었던 우리 가족은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무궁화를 타고 좌석을 마주보게 돌린 후 영감은 아이들과 종이접기를 하고, 뜨거운 히터 바람에 나른해진 나는 꾸벅꾸벅 졸며 2시간 걸려 서점에 도착했다. 서점은 백화점 8층에 있었다.

    서점 구경을 하고 나니 배가 고파져 밥을 먹기로 했다. 8층에서 1층으로 내려갔다. 아이들은 엘리베이터 밖으로 보이는 고층 빌딩들에는 관심이 없고, 방금 산 책을 엘리베이터 바닥에 펼쳐놓고 거기에 코를 박고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갔더니 한층이 모두 먹거리였다. 마치 음식 놀이동산에 온 것 같았다. 밝은 조명과 경쾌한 음악, 북적이는 인파에 활기가 넘쳤다. 안으로 들어가자 디저트 코너가 나왔다. 커피, 케이크, 아이스크림, 마카롱의 화려한 행색이 눈길을 끌었다. 좀 더 들어가자 밥이 등장했다. 국밥, 주먹밥, 회전초밥, 팟타이, 짬뽕 등 온 나라의 음식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내가 나열한 것은 일부에 불과하고, 디저트든 밥이든 종류가 3배쯤은 더 있는 것 같다.

 

   나는 한 팔에는 세 살짜리 둘째를 한 팔에는 책이 가득 든 짐가방을 들고, 화려한 간판과 정교하게 전시된 음식들을 구경하느라 비틀비틀 걸어갔다. 운전 중이었다면 '전방주시 태만'이었다.

    점심시간 백화점 푸드코트는 사람들로 꽉 차 있어 앉을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어 그 곁에서 잠시 기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같은 식탁에 앉아 있어도 저마다 다른 메뉴를 골랐는데, 열 사람이 있으면 열 개의 메뉴가 있었다.


    '뭘 먹지?' 선택할 때 내 머릿속에서는 생각들이 엎치락뒤치락 씨름을 한다. '기름진 게 당기나?' '뜨끈한 국물은?' '평소에 못 먹던 걸 먹어볼까?' '저 집은 서울에서 유명하다던데..' 서서 메뉴판을 족히 10번은 읽는다. 메뉴를 추리고 한 세 개쯤 남으면 남편에게 뭐 먹을 거냐고 한 번 물어보고, 내가 추린 것 중에 먹을 생각은 없는지도 물어보고. 

    겨우 음식을 주문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주문하고도 나는 메뉴판을 본다. 그때부터는 '다른 거 시킬 걸 그랬나' 고민하는 것이다. 참으로 부질없어 보이지만 이것이 평소에 내가 밖에서 음식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꼼꼼하게 따져야 손해 보지 않는다는 세상이라 그런가.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할까? 물론 무엇을 먹느냐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딱히 건강한 음식을 찾는 것도 아니다. 돈까스냐 초밥이냐 짜장면이냐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내 욕망의 꽁무니를 좇고 있었던 것이다. '맛있는 걸 먹겠다는 욕망' '내 마음에 쏙 드는 음식을 고르겠다는 욕망'이다.


    음식을 고른다는 것은 일종의 '나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까. 내가 고르고, 내가 먹고, 음식 사진을 내 SNS에 올리는 것으로 나의 개성이 표출되면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자기 PR이 중요한 세상, SNS 가득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이야기하는 이미지가 가득한 세상이다. 그렇게 나를 세상에 잘 드러내면, 잘 사는 걸까.

내 경우에는 꼭 그렇지는 않더라. '좋아요'로 인정받는 기쁨은 순간이다. 나의 욕망을, 나를 계속 어필하는데도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꼈다.


    하던 생각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나는 마침, 내 욕망을 줄이고 타인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렇다면 '나를 말하는 대신 너를 보기'가 메뉴선택에도 적용될까? 침묵으로 자기 농도(욕망)를 줄이라는 코이케 류노스케의 말처럼('말 안 하면 손해 아닌가요'), 메뉴선택에도 침묵해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의 욕망을 줄이는 셈은 되는데, 그럴 때 '너'를 어떻게 볼 수 있을지는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뭐 먹을 거야?" 영감이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나의 욕망을 줄여보자.

    "아무거나. 근데 오늘 속이 좀 안 좋아서 매운 건 빼고요."

    끝이었다. 영감이 어떤 것을 가져와도 만족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영감은 고민이 조금 되겠지만 나만큼 힘들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 병적으로 고민하던 나보다는 훨씬 적게 고민할 것이다.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 근처에 있는 것 중에 평소에 내가 먹던 음식으로 가져올 것이다. 내가 골랐다면 아마 백화점을 한 바퀴 돌고 한참을 고민한 뒤 후보를 세 개로 추리고 다시 고민한 뒤에 그중 하나를 주문했을 것이다. 어쩌면 메뉴를 두 개 시켰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영감을 기다리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백화점이라는 공간에서 나는 음식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대신 자리에 앉아 아이들과 눈을 맞추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순간 나는 우리 주변으로 단단하고도 아늑한 느낌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커다란 알이 우리를 품고 있는 것 같은, 혼란 속에서 맛보는 작은 평화였다.

    영감은 비교적 빨리 돌아왔다. 그리고 내 앞에 떡이 가득 든 만둣국을 내려놓았다. 뽀얀 만둣국과 김치. 나는 그 밥상이 마음에 드는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조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배고픈 내게 먹을 것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영감이 수고스럽게 가져다준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만둣국은 정말 맛있었다.

    그러나 나는 영감에게는 '잘 골랐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칭찬했다면 그는 다음에도 내게 맞춰 잘 고르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마치 수수께끼를 풀듯이 말이다. 나는 그의 선택을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감사하다고, 맛있다고 말했다. 영감은 조용히 씨익 웃었다.


    욕망이 빠진 빈자리에 아이들과 남편이 들어와 가득 찼다. 그저 그런 외식으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질 뻔했던 한끼, 아니 하루였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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