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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바 Jun 24. 2024

[함께 먹는 밥] 밥상에서 하는 인생 공부 1단계

7살 아들과 음식점에 갔던 날, 따뜻한 쫄면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자 아들은 앞접시를 두고 뜨끈한 국물을 다섯 숟가락 덜었다. 차가운 물도 다섯 숟가락 더했다. 거기에 국수를 덜어 메밀 소바 먹듯이 적셔 입으로 가져갔다. 지켜보던 나는 아들이 ‘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물을 타면 간이 약해질 텐데 싶어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먹으면 맛있어?”(나도 따라 하고 싶어서 물어본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라고 말하자 아이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이게 내 취향이야. 난 이렇게 먹어야 맛있어.” 아들이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정말이지 아들이 부러웠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7살 아들은 벌써 ‘취향’을 알고 있구나. 뭘 모르는 건 나였다. 맛있게 먹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아이에게 한 수 배웠다.



아이들은 밥상에서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평상시에 쓰는 표현을 따라 하며 애늙은이처럼 보이는 것도 재밌었고, 추상적인 단어를 올바른 문맥에 끼워 사용하는 것은 대견했다. 아동의 언어능력은 가족식사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식탁에서 활발하게 의견을 나눌수록 좋아졌다는 연구가 있다. ‘가족의 식사가 책읽기나 장난감 놀이 등을 포함한 거의 모든 활동보다 아이의 어휘력 향상에 효과적’이라고도 한다.


‘취향’이라는 단어를 써서 나를 놀라게 한 아들은 평소에는 말이 적다가도 가끔 돌변하여 수다쟁이로 변했다. 아들에게 선물을 사주기로 약속한 날 내 옆에 앉아, 만약의 경우, 선물을 받지 못할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내게 들려주었다. “원하는 장난감이 없을 경우에는… 너무 비쌀 경우에는… 택배가 늦을 경우에는…”어찌나 청산유수인지, 어떤 경우에도 마음에 쏙 드는 장난감을 무사히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설득당했다. '경우’라는 말은 어디서 배웠을까. 내가 아이에게 쓰는 단어는 아니다. 어쩌면 저녁 식사 중 나눈 나와 남편의 대화, 어른의 대화에서 주워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족이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자리는 밥상 앞이니 말이다.


우리 가족이 일상을 공유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수다를 떠는 상호작용 또한 밥상에서 펼쳐진다. 오늘 학교에서 발견한 아기새 이야기부터 친구와 다투고 속상한 마음은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맛있는 반찬을 더 먹고 싶으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감 연습도 이루어진다. 상대의 표정을 읽고 지금 어떤 느낌인지 공감하는 연습을 하며, 어떤 행동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어떤 행동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지 그들의 반응을 통해 일희일비하며 체득해 나간다.



얼마 전에 대화법 교육을 들으러 갔다. 일대일로 짝을 지어 실습을 하라고 했다. 나는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학생이라 쑥스러워 쭈뼛거렸다. 대화법 이론은 간명했고 어렵지 않아서 굳이 실습을 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찰나의 의심이 스쳐갔지만 불안을 잠재우고 참여했다. 해보니까, 이제껏 몰라서 못했더라.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화법은 머릿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짝이 실제상황처럼 내게 말을 걸어주고 대화가 시작되니 대화법이 머리에서부터 몸 전체로 이해되어 나갔다. 연습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와 같이 느껴졌다. 공감받는 느낌에 가슴이 든든해지면서 당장 누군가에게 써 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온몸으로 배운다는 느낌이었다.



3첩 반상보다 나를 배부르게 하는 책을 좇느라 식사 준비에 늘 게으르지만, 볶음밥이나 파스타처럼 한 그릇 요리나 고구마를 구울 때가 많지만, 함께 하는 밥상임은 변함이 없고 싶다. 일이 바쁜 날에도 밥은 함께 먹고 다시 일을 하러 가려고 한다.


밥상은 키재기 눈금이다. 밥상에 앉으면 아이들이 자라는 것이 보인다. 어제는 쓰지 않던 단어를 오늘은 쓰고, 어제는 말하지 못했던 생각을 오늘은 말하고, 어제는 감당하지 못했던 감정을 오늘은 의연하게 감당해 낸다. 나는 오늘도 밥상의 힘을 빌려 아이들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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