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일터를 합치다
5년 동안 영감은 새벽에 출근했다. 아이들은 이제 아빠 없는 아침이 낯설지 않지만 아빠가 쉬는 날이면 일어나자마자 아빠를 찾는다. 나도 마찬가지라서 영감이 쉬는 날엔 식탁에 앉아 책을 읽으며 영감이 구워주는 프렌치토스트를 기다린다. 내가 그 순간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침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보다는 우리 가족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구나 하는 안도감이 나를 다른 걱정거리로부터 해방시킨다.
일찍 출근하는 데 큰 불만은 없다. 영감이 없어도 나는 아이들을 잘 챙기고 아이들도 아빠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는 않는 듯 해 다행이다 싶지만 아침밥을 먹으며 둘러앉아 ‘우리 오늘을 잘 보내보자’ 말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나는 우리 가정 안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롭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만능감을 느끼기에 가족과 함께 시작하는 아침은 내게 큰 의미가 있다.
5년 전 처음 가게자리를 물색할 때는 첫째가 갓 태어났기 때문에 일터와 집이 연결된 공간을 원했다. 딸랑,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뒷방에서 드르륵 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잠깐 아기를 눕혀놓은 내가 반갑게 손님을 맞는다. 그런 장면을 그리며 공간을 찾았지만 애석하게도 끝내 구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집에서 아기를 돌보고 영감은 혼자 가게에 나가 제빵사와 판매원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 했다.
이제는 아이들도 어린이집에 다녀 나는 이전보다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터와 집을 연결시키고 싶은, 즉 일과 삶을 하나로 모으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우리는 20평 살림을 4평으로 줄여 가게 한 켠으로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친정아버지와 영감이 달려들어 침대 퀸 사이즈 두 개 정도 되는 평상을 만들었다. 평상 옆에는 아이들 이층침대를 놓고 책꽂이, 옷걸이, 신발장 정도만 갖추고 지내보려 한다.
사실 내가 이사를 제안한 건 훨씬 전의 일이다. 그때는 영감이 거절했는데, 자신이 일하는 곳을 아이들이 침범해 엉망으로 만드는 게 싫다고 했다. 예전에 그에게 일터가 분리된, 지키고 싶은 자신만의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그 자리를 가족들에게 내어주겠다 한 셈이다.
영감이 가게에서 빵을 만들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공부한 것을 영감과 나누고 함께 의논해서 양육 방향을 결정했다. 그러다 보니 영감은 아이들에 관해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는 게 없으니 상대적으로 많이 아는 내게 의존했다. 내가 하자는 대로 매번 군말 없이 따라주어 고맙기도 했지만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었다.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는 어른이 필요하고 부모가 그런 어른이 되어야 한다. 일과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어른.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직면하고 변화시킬 근면함, 용기가 있는 어른. 나는 영감에게 우리가 바람직한 롤모델이 되어보자고 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 대신 두려움 대신 지금부터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알고 자라날테다. 다행히 우리는 자유롭게 노동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기에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자유시간을 만들어 마주 앉아 책을 펼쳤다. 일은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의 형태에 따라 변화한다. 일이 우리 삶에 녹아든 것이다.
삶은 가고자 하는 방향만 있을 뿐 어느덧도 고정된 것은 없다. 아이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이고 나와 영감은 한동안 아이들에게 맞춰 살아갈 테니 지금 우리가 어찌 살겠다 계획하는 일이 그대로 될 리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항해하는 돛단배처럼 바람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고 돛을 폈다 접고 쉬었다 다시 나아가자. 그렇게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