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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보람 Apr 07. 2024

청첩장에 부모님 이름을 빼도 될까?

청첩장 - 3탄 |결혼식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청첩장을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다.

나와 류가 사용할 버전과 부모님들이 사용하실 버전.


우리 둘이 사용할 버전은 이렇다.

1. 부모님들의 성함을 넣지 않는다.

2. 우리 둘에게 들어오는 축의금은 전액 후원할 예정이라, 후원처를 안내하는 내용을 넣는다.




청첩장에는 '000(아버지 성함), 000(어머니 성함)의 장남 000' 이런 식으로 부모님의 성함이 들어간다. 결혼식의 주체인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부모님의 소유격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이러한 형식이 나에게는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결혼 당사자들을 독립적인 주체가 아닌 부모의 자식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마 우리나라 혹은 동아시아의 문화일 것 같은데 왜 그런지 추측해 보자면, 우리나라는 결혼식에 부모님의 손님들이 많이 오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모님이 '뿌린' 축의금을 '거두어'들이는 날이기도 하니까.


고민의 여지없이 청첩장에 우리 둘의 이름만 넣고, 다만 부모님들이 사용하실 청첩장에는 부모님들의 성함을 넣기로 결정했다. 노션으로 청첩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청첩장을 만든 뒤 복제해서 부모님들의 성함을 넣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부모님들께 청첩장을 드릴 때 성함을 넣는 걸 깜빡했다.

우리 부모님은 별말씀 없으셔서 몰랐는데 류의 부모님께서 류에게 연락을 하셨다. 우리의 이름이 빠져있다고.


연락을 받고 화들짝 놀랐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죄송한 마음에 얼른 부모님의 성함을 적어 보내드렸다. 어머니들의 성함을 왼쪽에, 아버지들의 성함을 오른쪽에 담았다.


그날 밤,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류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는데.. 부모님 이름 순서 바꿔달래.."




보통의 청첩장은 남자의 이름을 먼저 적는다. 부모님 성함도 아버지 먼저, 결혼 당사자들의 이름도 신랑 먼저. 내가 만든 청첩장에서는 류가 아닌 내 소개를 먼저 넣었다. 아버지 이름보다 어머니 이름을 먼저 넣었다. 류의 아버지께서 이걸 바꿔달라고 연락하신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류의 얼굴에 스트레스가 가득했다. 가득하다는 말로는 모자랄 정도로 힘겨워 보였다. 이 요청이 류에게도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류가 나에게 전해준 이유는 이랬다. 류의 부모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꼬투리 잡힐만한 일을 하는 걸 원치 않으신다는 것. 남들이 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


나처럼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아니었지만 가뜩이나 가게 일로 피곤한 류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알겠다고 대답했다.




류는 잠들었고, 나는 잠들지 못했다.

심장이 새벽 내내 요동쳤다.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져서 뇌가 풀가동되는 바람에 잠이 오지 않았다.


류의 어머니의 삶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학교의 과학 선생님이었다. 그 시절엔 여자를 대학까지 보내는 일이 드물었는데, 류의 외할아버지는 딸도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이다.


류의 어머니는 류의 아버지와 결혼해 딸을 낳았고, 2년 뒤 류를 낳았다. 그리고는 학교를 그만두셨다. 그 시절에는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일을 그만두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평생 류와 류의 누나를 키우셨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게 하고, 외식 대신 집밥을 해먹이며 알뜰살뜰 살림을 하셨다고 했다.


내 직업을 포기하고 평생 남편과 아이들을 뒷바라지한 결과는, 아들의 청첩장에 남편보다 먼저 이름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자꾸만 나를 슬프게 했다.




부모님 성함의 순서를 바꿔드린 것이 끝은 아니었다.

사실 류의 부모님께서는 청첩장에 내 소개가 류의 소개보다 먼저 들어간 것도,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커플들이 비슷한(사실상 똑같은) 청첩장을 만드는데 우리의 청첩장만 다른 것도 반기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포털에서 '모바일 청첩장'을 검색해 수많은/똑같은 청첩장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남들과 똑같은 청첩장을 만들었다.이 청첩장을 류의 부모님께 드리면서 '혹시 반항하는 것처럼 보이려나?'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반전이었다. 류의 부모님께서는 드디어 기뻐하셨다.


우리의 청첩장은 세 가지 버전이 되었다.

1. 우리 둘이 사용할 버전

2. 나의 부모님이 사용할 버전

3. 류의 부모님이 사용할 버전



그런데, 청첩장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이게 끝이 아니다.

그건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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