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마음 2
1. 물난리
할 말이 참 많은 기록적인 폭우를 기점으로 여름은 끝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애먹이던 에어컨과 이번 여름은 사람들에게 참 많은 상처를 남기고 지나간다.
너무 기다려서일까, 그렇게 비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겐 채 가지 못한 비가 서울에 내렸다.
언덕배기에 자리한 안암은 큰 피해가 없었지만, 다행이라고 말하기에 서울은 어두웠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불우이웃들의 사연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저마다의 사연들을 읽으면서
어째서 그래야 했는지, 어쩌다 이웃을 챙길 여유를 만들지 못하는 세상이 된 건지 슬프기 짝이 없지만,
반지하에 갇혀있던 아이를 구하는 이웃들의 처절함이 담긴 영상을 보면 또 나는 여전히 사람은 정말 악한가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한다. 우리는 정의나 오지랖 앞에서 그저 자신의 무능력함을 쉽게 인정해버리고, 모른척하며 스스로를 상처 주고 있진 않을까. 그런 세상에서 오로지 타인을 구하기 위한 필사적임은 실로 빛이 났다. 이제 괜찮다며 아이를 껴안아주는 모습은 내 눈물 버튼이다.
그렇게 마주했던 수해를 통해 알게 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생각보다 암울했지만 절망하기엔 이타적이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잘 챙길 수 있는 어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2. 현금
손님들 중에 종종 현금을 내시는 분들이 계신다. 현금을 내는 게 무슨 대순가 싶겠지만 지갑 속 현금을 처리하기 위해, 신용카드를 안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혹은 감사인사를 대신해 현금을 내시는 것.
지갑을 안 들고 다니시는 분들도 많은 세상에 맛있게 잘 먹었다며 굳이 현금을 꺼내 주시는 경우가 있다. 카드 수수료라도 빼지 않고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혹은 그 카드 수수료도 부담되는 자영업자의 삶에 대한 공감에 현금으로 계산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신다.
(오해가 있을까 싶어 말하지만, 카드결제를 미워하거나 하진 않는다. 어차피 포스 결제 처리를 하니 현금 영수증을 안 하신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
그래도 나는 그 마음을 받는다. 자신이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를 다해 표현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3. 결국은 마음의 문제
결국 장사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감정의 방향이 가게의 이미지일 뿐 아니라 음식의 이미지이기도 하며, 가게를 떠올렸을 때 느끼는 기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왜"하는 것인지를 설명하기도 하여 스스로를 노예로 느끼게 할 것인지, 자존감을 가지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해 준다.
누군가는 현금을 받고 '아 귀찮게 현금을 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현금을 주시는 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오랫동안 구전되는 물 반잔을 이야기와 비슷하겠지만, 결국은 정말 마음의 문제다.
내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이다.
와, 물이 반이나 차있네!
에이, 물이 반 밖에 없잖아.
는 같은 말이다.
라는 말을 귀에 박히게 들었다고 한다.
4.1년
나의 생각으로 온통 가득한 안암이 이제 첫 돌을 맞이했다. 3개월이면 알 수 있다던 선배들의 말에 의문을 가질 정신도 없이 순식간에 1년이 와버렸다. 요리사로 연차를 쌓아가면서 매일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내가 성장했는지 알 수 있는 척도는 내가 선배의 일을 얼마나 빼앗았는가,였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청소를 담당하던 땐 샐러드를 손질하던 선배의 일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곁눈질하고,
샐러드를 손질하고 나선 불을 쓰는 선배들을 따라 하며 내 차례를 기다리고,
그 시간이 지나서 주방 운영을 위한 메뉴 개발과 팀의 성장을 위한 리더십을 고민했다.
눈앞에 있는 것들을 욕심내다 뒤돌아보니 내가 어느 정도 성장했구나 했던 것처럼, 안암 역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개인의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안암은 내가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과 손님들이 성장시킨다는 것. 우리는 손님을 통해서 성장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1년은 악착같았고, 그 덕분에 생각보다 잘해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주변에 잘 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우리의 성장을 함부로 자랑하긴 어렵지만
우리의 시간은 분명 지나 보낼수록 단단해질 것이라 믿는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게 무엇이든, 우린 부끄럽지 않게 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