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Lead
사람이 삶을 유지함에 있어선 꽤 많은 능력이 필요하다.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관찰력, 응용력, 그를 위해 필요한 메타인지, 그리고 정치력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일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삶의 대부분을 노동자로의 역할로 보내는 대부분의 사람은 일에 필요한 능력이 생존 자체에 필요한 능력과 구분 지어지지 않는다. 물론 일과 삶을 구분지어야 할 필요성은 존재하지만, 자유노동시장에서는 권장사항이지, 좀 더 책임 있는 자리를 위한 권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해서 생존 과정을 통해 얻은 삶의 가치관은 매우 중요하다. 내 주변인들의 성향과 성품은 나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며, 그 가치관을 스스로가 어떤 노동자가 될 것인지도 결정하게 한다. 그렇게 생존의 시간을 지나 보내다 보면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 위치나 입장이 되는데, 내가 이해한 Leader는 분명히 생존이라는 목표의식을 향해 타인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릇을 이야기한다. 나는 태생적으로, 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장종지라고 생각한다.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거대한 그릇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음을 아쉬워하다 그들 역시 큰 그릇으로 태어나진 않았었고, 삶의 과정들을 통해 커졌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서 조금이라도 더 넓은 그릇이 될 방법을 찾곤 한다. 멀리서 볼 때 넓어 보이는 그릇을 가진 사람을 가까이서 관찰하려고 노력하던가, 종잇장처럼 얇디얇게 펴서라도 조금이나마 더 넓은 그릇을 가지려 노력하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믿는다. 해서 실패도 하고, 누덕누덕 누더기가 되어서 메워야 할 곳이 잔뜩 보이는 그릇이 되면, 그땐 또 주변 사람들이 메꿔주기도 하고 하면서 나는 조금 더 큰 간장종지가 되지 않겠나 믿고 있다.
평생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내 그릇에 담지 못하는 사람들을 흘려보내기도 하고, 그 아쉬움에 더 절박하게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그러다 보면 누가 내 그릇 안에서 놀든, 몇 이서 놀든 상관없이 다 담을 수 있는 시간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기에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지나 보내고 나면 어른이 된다. 어른은 삶에 있어서 목표이고, 리더는 일에 있어서 목표이지만 지금 내 관점에선 동의어다. 훌륭한 어른은 좋은 리더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좋은 어른들은 그 어려운 삶이라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잘 견지한다. 그 많은 문제를 지나가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킨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지켜낸 가치관은 나이가 들어서 빛을 발한다. 갈고닦은 어떤 가치는 장인의 풍미를 느끼게 한다. 그중 누군가는 배움에 있어서 개방적이게 되고, 누군가는 폐쇄적으로 만든다. 나는 그것을 본인의 그릇 크기를 인지한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이 간장종지라는 걸 아는 사람은 남들에게 자신의 그릇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해서 배움에 부끄러움이 없다. 그 배움이 자신의 그릇을 키워줄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과, 정말 순수하게 무엇인가를 더 알게 되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크기를 모르는 사람은 본인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 방법을 배척하게 된다. 그리고 배척하는 방법을 성장시킨다.
나이가 들수록 다양한 배척의 기준과 잣대가 생긴다. 저 사람은 저래서 안되고, 저 사람은 딱 보니 안되고, 저 사람은 지켜보니 안된다. 한두 개의 기준을 통과해도 7번째 기준에서 탈락하면 탈락이다. 그렇게 늘어난 기준이 사람 하나를 평가하는데 수백 개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는 복잡스러운 프로세스를 가진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그중 한 가지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된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떤 프레임에 의한 흑백논리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 많은 잣대의 본질은
상처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배신, 고독, 기타 여러 가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사건들이 나를 상처 주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사람에 대한 기준이 많았던 게 아닐까.
가끔 돌아보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됐네 하지만, 그런 부분을 돌아보면 아직은 어리다는 생각이 훨씬 많이 든다. 좋은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음은 물론이고, 여전히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을 통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소스를 찾는 게 나와 내 동료들을 위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내가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는데, 온 힘을 다하지 않아 놓고 운 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온 힘을 다하면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안다. 그리고 운이 나빠도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하지 않아 놓고 운 탓을 하는 사람도 주변 사람들은 안다.
정말 운이 부족했던 사람은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누군가 120%를 끄집어내려고 발악하고 있을 때 그들을 바보 취급하면서, 70%를 하면서 안 좋은 결과엔 운이 나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외면한다고 현실이 스스로를 지나가지 않는다. 물론 악착같이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도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끝났다고 99% 확신에 가득 찰 때 결과가 바뀌기도 한다. 발렌 어스 때도 말했지만, 멈춰 서면 그 자리가 결과다. 내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운이 다다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언젠가 안암이 과정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성공적이었다 말하고, 누군가에겐 실패였다고 오르내릴 수 있겠지만, 내가 버려두지 않는 경험은 결과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놓은 경험은 그제야 운에 다다를 테다. 내가 겪는 안 좋은 일은 전부 경험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같은 일을 겪었을 때 내 주변인들에게 운이 나빴던 일로 남지 않는다.
만약 내가 기초생활 수급자로 동사무소에서 나눠준 쌀을 지고 집에 가면서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면,
선생님의 배려로 무료로 다니던 학원, 점심이면 수돗물이나 마시다 원장 선생님이 쥐어준 5000원을 들고 샌드위치 사들고 편의점 간판 뒤에 숨어 펑펑 울면서 서러워했던 그날에 내가 멈춰서 있었다면,
방학마다 굶고, 학기 중엔 무료급식 덕분에 하루에 한 끼는 채웠던 그날에 멈춰서 남들 탓하고
베베 꼬인 내 인생 탓만 했다면, 나는 분명 평생을 운이 안 좋은 사람으로 남아있었을 거다.
누구나 웅크려야 할 시기가 있다. 마음도 정리가 필요하고, 현실이 내 생각과 달라서 힘들 때가 있다.
그 시간을 또렷이 보내고 나서, 일어서야 할 시기도 있다. 그 시기를 정하는 건 본인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가 상처받고, 치유를 필요로 한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건, 누군가 자신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탓을 하는 것에 시간을 사용할 때
인생은 디벨롭이라면서 여기가 밑바닥을 웅크렸다 뛰어오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
함부로 운이 없다고 말하지 않길 바란다. 그 주변인들이 당신에게 써준 마음들을 생각해서라도.
스스로 운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겐 기회가 왔을 때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다.
사람들은 70에서 포기하는 사람보단 120에서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마음 아픔을 공감하고 응원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치면, 나는 너덜너덜하지만 간장종지보단 조금 더 큰, 내 주변 사람을 닮은 나만의 그릇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고민을 하다 정리하기 위해 남긴 글.
머릿속이 정리되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