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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인장 Dec 23. 2022

프로젝트 안암(安岩)

#18. 연말휴가와 설문지

1. 연말휴가

연말휴가를 기획한 이유는 "힘들어서"다. 그 힘듬의 이유가 워낙 다양하고, 이 불안정한 자영업자의 삶에 쉴 날이 어딨는가 를 이야기하는 선배들의 말에 공감하지만 그렇기에 쉬기로 했다. 무턱대고 달리기만 한다고 멀리 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유야 워낙 다양하지만, 말해봐야 핑계 같은 느낌이 들어 힘들다는 이야기를 나열하진 않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중 한 가지 이유를 글로 남겨두자면 고립감이다.


2. 지박령


간혹 손님들에게 주변에 가면 좋을 곳을 추천해달라는 문의를 들을 때가 있다. 우스갯소리로 "저는 지박령이라 주변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누군가에게 나의 기호를 기준으로 무엇인가를 추천하기엔 내가 너무 오래전 가졌던 기호의 기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안암을 열고 가게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으므로.

매출이 안정되면, 가게가 안정되면, 직원이 뽑히면 하려고 했는데 사실 그런 순간은 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기가 어려워진다. 보는 광경이 항상 같으니 그럴 수밖에. 

우스갯소리로 말한 지박령이라는 단어는 현재의 나를 표현하지만, 그 단어 속에 나를 가두기도 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왜 소비하는지, 무엇이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지 예민하게 반응하기가 어려워졌다. 

가게 열고 고작 1년 반인데도 둔해졌단 느낌이 든다. 

여기저기 안테나를 세우기도 어렵고, 소위 핫한 곳에 간다는 생각만으로 피곤해지기 일쑤라. 


3. 루틴


한동안 집과 일이 루틴의 전부였다. 직원을 아직도 충원하지 못한 우리는 다음날 영업을 위한 컨디션 조절이 필수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는 내가 해도 되는 고민이 아니라 우리 직원이 생각하게 될 고민이다. 나조차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는데, 어찌 아니랴. 아무리 현세 인류에게 노동이 당연하다곤 해도, 그 당연함이 삶을 잡아먹는 건 곤란하다. 우리는 프로니까 컨디션 조절을 위한 루틴이 필요하지만, 루틴에 잡아먹혔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쉬는 날에 아파서 움직이질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이게 맞나 싶은. 

나의 루틴은 필요요소이자 영업일을 버티기 위한 생존요소였던 것. 나만 그러겠나, 다들 그렇지. 


4. 새로운 것 


그래서 휴가를 길게 낸다. 멀리 가도 좋고, 가까이 가도 좋지만 루틴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새로운 것들이 현재의 안암에 도움이 될지도, 훗날의 안암에 도움이 될지도, 또는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 계산기 두드려서 시간을 사용하는 건 더 많은 사람들을 책임져야 할 때를 위해 남겨두자. 내가 불안한 건 닫았던 가게를 손님들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나의 일에 가로막혀 그 건너편을 보지 못하고 고립이 지속되어 퇴보하는 일이다. 


5. 설문지

술을 준비했다. 당첨된 세분 다 잘 가져가셨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넛지효과를 기대하며 준비했던 설문지는 생각보다 정말 많은 분들이 작성해 주셨다. 

개인적 호기심에 가까운 질문지의 내용인 데다 설문 참여보단 질문 자체를 머릿속에 남기는 게 목적이었던지라, 읽어본다는 것에 의미를 뒀다. 그럼에도 120장 정도의 참여가 있었고, 그 내용을 취합해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구석구석 존재한다. 


5-1. 효과

설문지의 내용

설문지의 역할은 2가지. 실제 방문자의 성향 파악, 그리고 넛지효과. 

넛지효과가 있었는가?  내가 원했던 것은 질문을 보고 음식을 접했을 때 맛있다에 부합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리스트를 만들어주는 것, 그리고 실제 방문자들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 사실 알 수 없다. 설문지의 질문 내용대로 맛을 결정하는 요소는 정말 다양하기 때문이다.

설문조사 효과에 대해 알기 위해선 설문지 배치 전 만족도를 알아야 하고, 

참여자의 만족도와 참여하지 않은 사람의 만족도를 확인해야 하므로 확인은 어렵다. 


5-2. 흥미로운 점  


설문지 배치는 머리 뒤쪽 창문에 붙여놓고 대기자 중 자연스레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설문 참여자들은 적극 참여자에 가깝다. 특징이 몇 가지 있었는데, 참여자 중 몇 분을 추첨해 저녁메뉴를 대접할 예정이었으나, 우리 쪽 사정 변경으로 "운암"이라는 전통주를 드리는 쪽으로 계획을 바꿨고, 당첨자에게 연락을 할 생각으로 인스타그램 아이디나 전화번호를 남겨주실 것을 요청드렸으나 꽤 많은 분들이 공백으로 참여해 주셨다. 

아마 "홍보" 목적의 연락을 취하는 것 등의 개인정보에 대해 민감한 것 같다. 

"왜요?"라고 남겨주신 분도 있었다. 다음엔 그런 부분도 좀 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 문항을 대부분 우리 가게에서의 경험이나 북촌에서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도록 배치했으나, 

몇 가지 답은 부정적 요소로 인식되도록 배치해 보았다. 이를테면 안암의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분들의 리뷰를 살펴보면 "마라탕"에 흠뻑 빠져계시는 분들이 흥미로울 정도로 많다. 

해서 맛있다의 개념 중 자극적인 요소를 좋아하진 않는지 묻는 답안을 넣어보았는데, 

예상대로 자극적인 맛을 좋아한다는 분은 없었다. 


과편집, 혹은 과표집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안암을 찾아오실만한 분들은 이미 "깔끔하다"는 리뷰로 음식을 파악하신 분들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또는 "초등학생 입맛"이라 불리는 이미지로 자극적인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걸 꺼려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런 걸 구분할 수 있는 문항을 넣어볼까 싶으면서도, 지금은 과욕이란 생각을 한다. 


5-3. 사람과 사람


그 와중에 맛있어서 또 왔다거나, 잘 먹고 간다는 등 감사인사를 남겨주신 분들이 계셨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힘을 냅니다.) 물론 컴플레인도 있었다. 

내가 이런저런 효과를 생각하고 이것저것 하지만, 그래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주라는 점은 사람을 뽑지 못하는 지금도 처음과 생각이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비웃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의 노력을 고마워하거나, 감사히 즐겨줄 줄 아는 분들이 계시다는 점.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달라지지 않는 게 있다면, 그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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