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꾼의 도구 09
장비에 돈을 아끼지 마라.
오늘 사든 내년에 사든 결국 돈은 미래의 내가 낸다.
오늘부터 쓰느냐 6개월 후부터 쓰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학생 때까지만 해도 데스크톱으로 웬만한 것들을 해결하고,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것은 비즈니스 맨들에게나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데스크톱은 게이머들한테나 필요하고, 웬만하면 노트북을 한 대씩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게임용 노트북도 나오니, 휴대성이라는 가치는 얼마나 커다란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일까.
처음 사용했던 애플 제품은 아이패드였다. 주방인들의 뒷주머니엔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한 꼬깃꼬깃한 스프링 메모장이 꽂혀있는데, 에버노트를 사용하면서 수정된 레시피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스프링 메모장은 많이 사라지고 디바이스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사람에게 주변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회의 내용이나 레시피 개발, 서칭에도 필요하고 시시때때로 참고하는 책의 PDF 파일을 소장하기도 하게 되면서 효율성 면에서 없어선 안될 도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 셰프는 알만한 사람 다 아는 애플 빠였는데(현재 진행형이다. 요즘엔 백 키친과 프런트 키친에서 애플 워치 무전기로 소통한단 이야기도 들었다.) 당시만 해도 핸드폰은 전화기였던 나는 틈날 때마다 옆에 가서 왜 그렇게 애플을 좋아하는지 꼬치꼬치 캐묻곤 했다. 효율적으로 많은 일을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그 능력의 많은 것을 흡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10분의 9, 애플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앱등이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가진 비아냥 10분의 1이었다.
그즈음 솊이 나한테 했던 말 중에, "네가 애플 제품을 전부 사용하게 되면 알게 될 거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게 왜 기억에 남냐면 "애플 생태계"가 가진 위력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 주변 모두 잘 아는 앱등이가 되어 있다.
정신 차려보니 나는 애플 없인 못 사는 사람이 되어 있다. 자연스레 핸드폰도 애플걸로 쓰고,
자연스레(가격은 자연스럽지 않다.) 노트북도 맥북을 쓰게 되었는데, 그 맥북이 결정적이었다.
그것만 아녔어도 팀 쿡을 욕하면서 애플을 칭찬하는 인지부조화를 겪지 않았을 거다.
속는 셈 치고 같은 말만큼 무서운 게 없다.
15년식 13인치 맥북
솊의 능력을 동경하다 보니 그 능력을 흡수하기 위해 맥 OS라는 이질적인 시스템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말 그대로 "속는 셈 치고" 샀던 맥의 OS는 반나절이면 익숙해질 만큼 사용자 중심적이었기에, 윈도우의 익숙함보다 맥의 직관성이 더 큰 가치로 느껴졌다.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맥 쓰는 게 불편한 상황이 많았음에도 꿋꿋이 맥을 쓰는데 이유가 있다.
(그때는 사과에 불 들어오는 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지금에야 윈도우 기반 노트북들과 안드로이드 기반 핸드폰끼리 연결해주지만, 애플의 클라우드 서비스는 다양한 디바이스를 한 개를 사용하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애플 서클"을 만드는데 특화되어 있었다.
이 작업을 여기서 하다가 저기서 할 수 있다니.
이게 혁신이 아니면 뭐였겠는가.
브랜드로서의 장점, 사람들이 가격을 욕하면서 설레 하는 모습, 새로운 업데이트가 나타날 때마다 서로 먼저 쏟아내는 기사들. 다 이유가 있는 게 아니겠나. 애플이 제공하는 사용자 경험을 대체할 서비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간결함을 보여주는 애플의 디자인은 다양한 기능을 가진 안드로이드와 삼성이 무슨 짓을 하든, 애플이 한국을 어떻게 대하든 눈물겹게 모른 척한다.
지금 애플이 만들어둔 환경을 경험하던 사람이 이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자금은
차라리 애플의 다음 제품이 그보다 더 낫길 바라는 마음보다 비싸다.
브랜드의 특장점만 이야기한 것 같지만, 그게 제품 자체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게다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기술적으로 부족하지도 않다. 레티나 디스플레이와 더 넓어진 디스플레이, 센스 있는 힌지, 간지 나는 터치 바(구매욕구를 높이지만 사용 효율은 적다). 분리된 ESC키. 넓어진 트랙 패드와 안정적인 키보드에 말도 안 되는 스피커, 그리고 진짜 말도 안 되는 마감. 무슨 광고글이냐 싶지만 전부 사실이다.
특히 트랙패드는.....
왜 다른 데선 이렇게 안만들지..?
애플 워치로 맥북 잠금 해제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친구의 모습과
혼자 신난 내 모습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사회성을 가지는데 도움이 되는 제품은 아니다.
게임을 하기에 적합하지도 않고, 공공기관에 접속할 때마다 움찔움찔하는 데다 (이젠 웬만하면 다 된다) 아직 윈도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지만(폴더를 그렇게 열심히 만든다)
가격만큼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도 확신을 못하겠지만 최근 했던 소비 중 가장 잘한 소비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 대도 맥북 살 거냐고?
너무나도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