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꾼의 집밥 01
집 앞 마트에서 레몬그라스를 발견했다. 냉동 레몬그라스를 사용하던 추억에 냉장으로도 레몬그라스를 구할 수 있는 대한민국 유통의 발전을 감격스러워하며 나도 몰래 장바구니에 담아버린 일을 계기로 탄생한 고수를 잔뜩 걸친 레몬그라스 치킨의 탄생.
닭이 먹고 싶다 + 튀긴 건 안 먹고 싶다 +배달 안 하는 거 먹고 싶다.
태국 음식점에서 고수를 더 달라고 하기 수줍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 고수를 잔뜩 먹을 수 있는 구운 치킨을 먹겠다.
중요한 점은 이렇다.
가슴살이 맛있었으면 좋겠다 + 고수를 많이 먹는다 + 집에 있는 걸 활용한
다 + 신맛이 나야 한다 + 기름 없이 자극적이면 좋겠다.
결과는 이렇다.
고수 + 솜땀 + 염지 + 시트러스 + 닭
그래서 필요한 재료는 이렇다.
사실 집에 이 정도 재료가 있는 집은 흔하지 않다는 거 안다. 몇 개는 필요 없는데 그냥 넣었다.
염지에 저렇게 향신료 많이 넣어 봐야 쓸데없는 경우가 더 많다. 없으면 과감히 빼라.
장바구니에 든 통닭부터 빼라. 집에 통닭 있는 사람이 어딨나.
하지만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저 정돈 투자하자. 집 앞 슈퍼에 가서 뜯어와라.
이렇게 해서 고수를 잔뜩 얹은 레몬그라스 치킨이 탄생했다.
솜땀 스타일의 오이 샐러드를 곁들인 간이 잘 벤 레몬치킨 구이는 레몬의 신맛과 향, 그리고 요거트의 발효 향을 전부 가지고 있다. 후추와 레몬(혹은 라임주스) 그리고 꿀을 섞은 요거트에 찍어먹으면 맛이 더 배가 된다.
가슴과 다리가 엄청 촉촉하게 잘 익었는데 안 씹어도 잘 넘어갈 정도의 익힘이다. 염지를 하면 간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점은 먹을 때 육즙을 많이 느낄 수 있다는 점인데, 삼투압 현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세포막 변성이 일어나는 건지, 아님 숙성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인지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염지를 하게 되면 생 닭을 익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분감을 느낄 수 있고, 덜 뻑뻑하게 느낄 수 있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뼈가 있는 닭을 사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개인 취향이다.
집안 축제를 할 때 준비를 하면 세상 지니어스를 마주한 닝겐들의 표정을 별거 아니라는 듯 오만한 표정으로 쳐다볼 수 있다.(중요)
다른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 비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증오)
사실 프라이팬으로 이 정도로 익히는 것은 숙련된 전문가가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까우니 포기하자.
최근엔 수비드 머신이 많이 공급되어 자본주의로 쉽게 익히는 방식도 있으니 참고하자.
또 다른 자본주의의 형태로 에어 프라이어가 있는데 생 닭이 들어가는 크기가 흔치 않으니 참고만 하자.
프라이팬을 사용하지만 뚜껑이 있어야 한다.
내장 쪽 을 밑으로 둔 채 찌듯이 익히다 뒤집어서 껍질 부위만 고소하게 익힌다고 이해하면 좋다.
고기가 익으면서 육즙을 뱉는데, 그게 증발하면서 찌듯이 익혀진다. 수분이 부족할 테고 산미가 필요하니 레몬 반개를 프라이팬에 짜주면 같이 끓으면서 여러모로 더 맛있어진다.
염지를 하고 요거트에 담가뒀던 닭이라 익으면서 뱉는 수분은 당분과 염분, 그리고 껍질의 콜라겐 기타 등등을 가지고 있어 감칠맛의 압축 파일 같은 것이 나온다. 그래서 프라이팬 바닥에 단짠으로 뭔가 잔뜩 나오는데 그게 내버려 두면 탄다.
프랑스 요리에서 디글레이징이라는 기법이 있는데 와인이나 기타 육수 등으로 긁어 주면서 닭 위에 끼얹듯이 뿌려주면 더 맛있는 것을 먹을 기회가 주어진다.
(이 부분을 집안 축제에서 설명해라. 오만한 표정을 한번 더 지을 수 있다.
설명쟁이가 등장하면 곤란해지므로 재빨리 자리에서 도망쳐야 한다.)
닭도 기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카놀라유에 섞인 닭기름을 만들어내는데, 숟가락으로 퍼서 프라이팬에 닿지 않는 껍질 부위에 지속적으로 부어주면 더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껍질을 굽는 동안, 혹은 프라이팬에 넣기 전에 모든 관절 부위에 칼집을 넣어주면 익힘 상태를 조절해주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힘내라.
우리 집은 치킨 먹을 때 오이소박이를 같이 먹곤 한다. 파파야가 없어 오이로 대체한 것이니 오이가 싫은 분들은 하다못해 무 채 썬 걸로 해도 식감은 유지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임은 내가 지지 않는다.
귀찮아서가 아니다. 솔직히 안 볼 거잖아. 귀찮아서가 아니다.
영수증을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안나 서가 아니다. 맛에 포인트를 두고 싶었다. 영수증 때문이 아니다.
그런 거 없다. 잠깐 놓친 의식이 행한 충동구매라는 사건사고를 무마하는 과정이다. 앞으로도 종종 이럴 거다.
한 컵 더 챙겨놨었다. 인증숏과 실제 음식은 다르다. 지금도 안 보이는 닭을 원래대로 고수를 뿌려 덮어놨으면 닭이 있다는 말을 안 믿었을 게 아닌가. 말 더 시키지 마라. 지금도 입에서 고수 냄새가 난다.
아니야 바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