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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리 Jul 01. 2021

아메리카노

 그냥 따라 마셨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카페를 가면 아메리카노를 시키길래, 나도 따라 시켰던 것이다.


 사실, 사무실에서 마시는 커피는 늘 믹스커피였다. 믹스커피는 희한하게도 양은 적은데 밥처럼 든든한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아침을 먹지 않고 회사에 가면 믹스커피 한 잔 뜨겁게 타서 왼쪽 책상에 올려두었다. 당장 마시지 않아도 일단 준비해두면, 당이 떨어질 때마다 힘을 주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날씬한 동료들이 믹스커피를 멀리 하기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친한 동료에게 '커피 한 잔 타 줄까?' 하면, 자기는 아메리카노만 먹겠다고 했다.


 그때가 2007년쯤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기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그쯤이었다. 이후, 회사 탕비실에는 믹스커피 옆에 인스턴트 블랙 커피 스틱이 자리 잡았다. 믹스커피 먹는 습관이 한 번에 정리되지 않았지만, 나 또한 점점 블랙커피에 손이 갔다. 마음은 달달한 믹스커피 쪽이었지만, 다이어트를 위해 블랙커피를 집어 든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의 고민이 있었고 결국 나는 완전히 블랙커피 쪽으로 돌아섰다. 이후,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든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 따라서 시키다가 점점 습관이 되고 나만의 취향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아메리카노만 마신다. 솔직히 물보다 더 많이 마시는 것 같다. 어떤 날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메리카노를 하루종을 마신다. 물론 한 모금씩, 한 모금씩, 홀짝홀짝.


 그러다 대장내시경 예약을 앞두고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 하루 이틀쯤이야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하루 종일 맥을 못 출 정도로 무기력하고 두통까지 있었다. 금식 때문일 수도 있으나 커피를 마시지 못한 탓도 있었다. 늘 커피를 입에 달고 살다가 하루 종일 못 먹으니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맹물만 홀짝홀짝 마시는데, 성에 차지 않았다.


 아메리카노 중독이었다.
 그동안 물보다 아메리카노를 더 마셨던 나의 몸을 들여다보면 분명 까만 아메리카노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 아메리카노를 입에서 놓지 못했던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아메리카노는 뒷맛이 깔끔하다. 아메리카노는 내 생각의 깊이를 도와준다. 아메리카노는 살이 찌지 않아 안심이 된다. 아메리카노의 그윽한 향으로 보다 지적인 상황을 연출해준다. 아메리카노는 소통의 양이다.


 내가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이유를 나열하고 보니,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중 아메리카노는 '소통의 양'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그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늘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한 순간의 공백도 없이 소통을 했다. '티키타카'의 경지를 넘어, 마치 우리 대화에 오디오 공백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이라도 가진 듯 열심히 말을 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아메리카노 잔이 바닥을 드러내면, 서서히 대화를 마무리하기 시작한다. 아메리카노 잔이 바닥을 드러냈다는 것은 '충분한 대화였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나 또한 상대방의 잔이 드러나면 내 잔에 많은 양이 남았어도 얼른 대화를 마무리하고 호로록 마셨다. 나 또한 대화가 끝났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최근 커피숍 창업이 많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처럼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대한민국 어느 곳을 가든 '커피숍'이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 거리에 나가 보면 집 근처 커피숍이 적게는 세 군데, 많게는 여섯 군데도 존재한다. 또 거리의 사람들은 어떤가? 코로나로 인해 현재는 덜하지만, 한 손에는 커피 잔을 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나처럼 서비스업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커피숍 하나 차려, 커피를 내리는 일을 하며 사는 것도 참 근사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어쨌든, 이제 내 인생에 아니 지구 상의 많은 사람들 인생에 커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한 때는 그 모습이 조금 이상했지만, 이 힘든 세상 커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도의 중독은 괜찮지 않나 싶다.


 오늘처럼 후덥지근한 날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나 또한 얼음 가득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옆에 두고,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일도 했다. 물처럼 후루룩 마셔버리기 아까워 한 모금씩 홀짝홀짝 마시며 생각했다. 쌉싸롬향긋한 커피가 지금 이 순간 없다면 참 외로웠겠다고.


 아직까지는 커피를 많이 마셔도 잠을 잘 자고, 위도 튼튼한 것 같아 마음껏 즐기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 연배가 있으신 분들께서는 나이가 들수록 잠이 없어지고 속이 쓰리다고 하시니 덜컥 겁이 난다.


 내 하루를 쌉싸롬향긋하게 채워주는 커피를 더 이상 마실 수 없는 날이 온다면 조금 외로워질 것 같다.

 과유불급!! 그래서 오늘은  이 한 잔으로 만족하고 내일의 커피를 기다릴까 한다.


 좋은 것은 오래오래 즐겨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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