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븟 Mar 13. 2022

제자리

부엌의 일과는 건조대에 쌓인 그릇과 기타 등등을 치우는 일로 시작된다.


마지막을 장식하며 꼭대기에 엎어둔 양푼도, 비스듬히 세워둔 도마도, 가지런히 열을 맞춘 접시도, 널브러진 국자도 기타 등등도 밤 사이에 완전히 물기가 말랐다. 하나씩 걷어 제자리에 넣으면 건조대가 텅 빈다. 이제 물기가 흥건한 식기들이 다시 빈 공간을 채울 테고, 그런 반복된 패턴은 일종의 규칙처럼 나의 부엌-생체리듬을 생성한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어쩐 일로 '제자리'라는 말에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대단한 질서를 부여하는 양 내가 무심코 제자리라고 일컫는 건, 사실 내가 암묵적으로 정해버린 곳이었다.


하기야 나는 정중한 태도로 반찬통에게 마음에 드는 자리가 어디인지 물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제가 정한 자리가 '제자리'라고 정의된다면 몹시 부끄러운 일이었다.


반찬통 입장에서는 개수대의 좌측 하단의 빛이 들지 않는 네 모퉁이에 크기대로 차곡차곡 쌓아두는 일이 당황스럽기도, 어떤 측면에서는 부당했을지도 모른다. 부엌의 효율성만 고려한 채 마음을 묻지 않는 대상에게 반감이 들었을지도 모르고. 








조심스레 반찬통 하나하나에게 말을 걸어보면 제가 머물고 싶은 자리가 하나씩 있을 수도 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유리 몸체에 연두색 뚜껑의 사각 통은 따끈한 온기가 뱅글뱅글 발생하는 전자레인지 위를 제자리라고 여길 수도 있었고, 내가 늘 해산물이나 새우를 담는, 동그란 몸체의 회색 뚜껑의 원형 통은 기분 좋은 커피 향이 배어있는 커피용품 칸에 로망을 품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한 정도는 흔쾌히 수용 가능한, 아기자기한 반란일 수도 있었다. 필시 부엌을 벗어나려는 통들이 있을 법도 하기 때문이었다.


가령 소파와 티브이 사이의 자로 잰 듯 정확한 가운데 지점이 제자리라고 말하는 황톳빛 김치통도, 호시탐탐 볕이 드는 창가를 노리며, 흙과 씨앗을 품은 화분이 되는 걸 바라는 뚜껑이 헐거워진 파란 플라스틱 통도 있을 수 있었다.


아무튼 반찬통들의 자의식은 나날이 높아만 갈 테고, 어느 날은 차갑게 달그락 소릴 내던 스테인리스 재질의 통의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 자신은 반찬통으로 태어나고픈 의도가 하등 없었다며, 지그시 하늘을 바라보며 내게 안녕을 고할 수도 있었다. 나는 일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겠지만 정녕 그것이 스테인리스 통의 진심이라면 자의식이 있는 인생의 선배로서 그간 나의 집이 답답했을 심정을 헤아려주며, 날개가 없어 공중에서 훅 떨어질 위험에 대하여 일러주어야 할 테다. 어쩐지 존재적 고단함을 알듯도 하여서...








괜한 질문을 던진 탓에 나의 부엌은 어수선하다 못해 무질서하며 느릿느릿한 카오스 되어버릴 테다. 게다가 이미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들은 사사건건 자신이 투명한 마음에 무얼 담고 싶은지 말하려 들것이다. 손에 닿는 아무 통에  멋대로 메추리알 장조림이나 봄나물을 담는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다.


그렇지만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마음에 담고 싶은지 묻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는 무생물이나 다름없겠군, '구시렁대며 번번이 돌아선 적이 있어서 그런지 정체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것은 유한한 시간이 주어진 모든 이에게 공평한 축복이어야 하는 듯하다. 그게 여러모로 맞는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Link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