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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븟 May 16. 2021

냉장고 말하길

'오늘 뭐 먹지,' 매일 같은 고민이다.


심지어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을 걱정할 때도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살기 위해 먹는다기 보단 먹기 위해 사는 존재에 가까운 기분이다. 그렇지만 잠들기 직전에 내일 아침을 걱정하다가 주섬주섬 야식을 먹게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는데 유용한 일이 아닐까 한다.






인터넷에서 적당한 레시피를 찾아 반복되는 고민을 해결할 때도 있지만, 실질적인 대화를 나누게 되는 상대는 따로 있었다. 바로 냉장고였다.


나는 항상 그 앞을 서성이며 무얼 먹으면 좋을지 물었고, 냉장고는 양문을 활짝 열어 내게 답을 했다. 양배추 반통을 내밀기도 했고, 냉동실 구석에 숨어있던 찐빵을 찾아주기도 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이는 청양고추 한 봉지를 내던질 때도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냉장고 사정에 맞추어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러 나갔고,  귀찮은 날은 궁여지책으로 한 끼를 때웠다. 대저 토마토와 계란 그리고 취나물이 전부인 어느 아침은 요령껏 그걸 한데 섞어 스크램블 에그를 해 먹었다 - 나물이 한몫을 거둔 의외의 조합에 흠칫 놀라 이런 게 결핍의 힘인가 했다.


그러나 냉장고도 어디까지나 한계가 분명한 탓에 식상한 대답을 늘어놓을 때가 더 많았다. 무성의한 어조로 십중팔구는 '비빔밥'을 추천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샅샅이 냉장고 속을 뒤져도 별다른 소득이 없어 나는 하는 수 없이 냉장고의 조언을 따랐다.  


양푼에 남은 반찬을 싹 쓸어서 담아 고추장 한 숟가락을 넣고 밥을 비비기도 했고, 밥 위에 달래장, 그리고 손으로 으깬 구운 김과 계란 프라이를 올려 비벼 먹기도 했다. 먹다 남은 된장찌개는 팔팔 끓여 밥과 함께 비볐다. 냉장고가 진짜로 내어줄게 전혀 없다고 난색을 표하면 나는 텅 빈 안쪽을 바라보다가 김치를 꺼내 참치와 슬슬 볶다가 밥을 비볐다.  






겨울이면, 나는 시금치를 과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추운 날 시장에 들러 검은 봉지에 담아오는 시금치는 하나같이 달았다. 끓는 물에 데친 다음 다진 마늘, 소금, 참기름을 살짝 넣고 버무리기만 하면 근사한 반찬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다. 봄이 바짝 다가올수록 나는 겨울철 잇템에 집착을 보이며 대량 생산자 모드로 전화된다. 기어이, 커다란 반찬통 두 개에 시금치나물을 잔뜩 담아 냉장고로 밀어 넣으며 봄을 준비한다. 그 모든 과정을 잠자코 지켜보던 냉장고는 호기롭게 한 치 앞을 내다보고 있었을 테였지만.





'밑바닥을 보이던 장조림과 시금치'


냉장고는 귀신같았다. 간이 세지 않아 후딱 해치워야 하는 시금치나물을 대면하는 순간은 금세다(그날도 나는 밥을 비볐다).






날짜가 임박한 식재료 목록을 나열한 메모를 이마에 붙인 채 지긋이 나를 바라보는 잔소리쟁이가 귀찮은 날도 있지만, 냉장고의 말을 새겨들으면 '알뜰살뜰'의 묘미를 알게 된다. 더욱이 비빔밥은 어떻게 먹어도 맛만 좋아서, 허물없이 속을 내보이는 냉장고에 대한 신뢰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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