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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븟 May 31. 2021

Life

과정이 의미였다.

사넬 미용실에서 단호히 “안 합니다,”를 외치며 퀴즈를 거절한 할머님 세분의 등장 이후로 <유퀴즈>는 왠지 챙겨보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비교적 꼬박꼬박 보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회차가 진행될수록 할머님들은 모든 걸 알고 계셨단 확신이 들었다. 그 티브이 프로의 매력은 어쩌면 나도 한 번쯤 어깨가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스쳐 지났을지도 모를 누구와 나누는 담소였기 때문이었다 - 어디로 튈지 모를 대화가 난무하다 투박한 마음의 생김새가 난데없이 드러났다.


그래서일까. 유퀴즈를 보다가 대화 틈바구니에 슬쩍 끼어드는 일은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생에 마지막 한 끼로 무엇을 먹을지 물을 때였다. 정해진 답이 없는 물음에 기다란 말들이 이어졌고, 나도 무얼 먹을지 고민했다. '마지막'이란 단어에 괜히 슬프기도 했지만, 덕분에 진지해져 버렸다.


간단히 요약하면, 나는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를 직접 만들어 먹고 싶었다.






어느 계절, 어느 장소에서 그런 순간을 맞이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지만, (습성상...) 즐겨 찾는 시장이 한 군데쯤 있을 듯했다.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선다. 때로는 인터넷 검색보다 시장을 두어 바퀴 도는 일이 더 도움이 된다. 진열대마다 유난히 수북한 쌓인 식재료 더미가 모습을 드러내며 나의 선택을 돕는다. 마지막이니까 뭐가 되었든 간에 요것 저것 아끼지 않고 듬뿍 담는다.


집에 돌아와 장본 걸 정리하고, 기나긴 조리 시간을 대비하여 챙겨 온 주전부리를 먹는 동안 머릿속으로 레시피를 그려본다.


드디어 시작이다. 티브이든, 라디오든, 유튜브든 소리를 높여 연속되는 동작에 으쌰 으쌰 추임새를 넣어준다. 흙이 묻은 초록을 손질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난다. 손질한 식재료에 양념을 더하며 맛을 보며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묻는 일이 반복한다. 


불에 올려둔 냄비에서 바글바글 맛 내음이 풍겨 오른다. 집안 곳곳을 가득 채운 그것은 내가 창을 열면 홀가분히 날아올라 동네방네 떠들썩한 안부를 전한다.


맛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며, 끓어오르는 열기를 뿜어내는 부엌의 정취에 기대앉은 나는 수평선 너머로 사그라드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식탁을 차리는 여정은 길지만... 그에 비하여 먹는 일은 뚝딱이 었다. 늘 그렇다. 하지만 느릿하게 과정을 즐기다 보면 손끝에는 싱그러운 촉감이, 귓가에는 도마에 닿는 칼날의 박자가, 코끝에는 허기를 알리는 신호가 닿으며 나도 부엌도 들썩였다.


생동감이란, 반드시 속도와 비례하지 않았다. 




 

'힘겹게 바위에 오른 거북이의 마음은 거북이가 안다'




아무리 애써도 높다란 산에 오를 수는 없을 듯한, 상당히 필연적인 예감이 스치기는 하지만 나는 점점 나의 전속력에 익숙해져 가며 그것의 의미를 묻는다.


여하튼 그 정도면 '마지막'이 아쉽지 않은 한 끼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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