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일인데, 필자가 신입사원 채용을 위해 서류전형을 하며 자소서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았던 적이 있었다. 워낙 많은 자소서를 보았지만, 그 중 기억에 남는 구절도 몇 개 있다. 그 중 ‘저는 반복되고, 지루한 일에 쉽게 실증을 내기 때문에 매일매일 새로운 일을 만들어나가겠습니다’라는 자소서 내용이 있었다. ‘一新又一新’을 신조로 삼고 강조하기 위해 작성한 자소서인 것같은데, 현실적으로 실무를 하는 담당자 입장에서는 그 말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회사의 업무란게 매일매일의 반복이고, 지루하고, 반복된 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실증을 쉽게 내는 사람이라면 회사 입사해 업무를 하다 익숙해지면 곧 퇴사하는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남자들이 군에 입대할 때 거창하게 큰 마음을 먹고 입대한다. 대부분 대한민국 남자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나라를 지키며, 신체 단련을 열심히 해 몸과 정신을 바르게 만들어 제대하겠다는 당찬 각오를 하며 입대를 한다. 하루하루를 결코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매일매일 운동하고, 시간나는대로 틈틈이 독서도 하며, 나 자신보다는 힘들어 하는 주변 동료를 위해 희생 정신을 발휘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런 다짐과 계획들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매일 반복되는 작업, 몸을 지치게 만드는 각종 훈련, 지루하리만치 잘 가지 않는 시간 등으로 인해 체력단련은 물론, 책 읽는다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멍하니 앉아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고, 군대의 정해진 Rule과 일상의 Routine에 본인의 의지가 굴복당하고 만다.
직장생활도 비슷한 것같다. 처음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는 친구들을 보면 눈빛도 똘망똘망하고, 온갖 일들에 호기심을 갖게 되며, 매사 긴장하고 하루하루 새롭게 변화를 추구하려고 Energetic하게 지낸다. 매일 새로운 업무를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직장 생활의 일상이 익숙해 지지 않도록 새로운 무언가를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이내 3~4개월 지나고 나서부터는 반복되는 일상에 점점 지치고, 지루해 한다. 그런 징조를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Point가 신입사원들이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다. 업무적으로 반드시 부딪쳐야 하는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고, 일상적으로 인사를 해야 하는 관계라면 처음에는 Eye-contact도 하고, 밝게 웃으며 표정관리를 하며 인사를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잘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마지못해 인사를 하더라도 고개만 까딱 숙이고 지나가거나 인사하는 행위 자체를 귀찮아 한다. 아마도 이 때가 신입사원이 점점 직장생활을 지루해 하고, 재미 없어하는 시기가 아닐까 한다.
거대한 조직에서 개인이 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일들은 한정적이고, 그 개인이 신입사원이라면 기존 직원들보다 더더욱 조직을 변화시키기 보다 현재의 조직에 적응하기 급급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도 이내 직장 생활을 지루해하는 선배들을 보고 따라하며 답습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날수록 직장 생활이 재미없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회사 입사를 위해 자소서를 작성하거나 면접볼 때, 입사지원자는 입사 후 본인에게 어떤 모습을 기대할까? 필자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신입사원들은 본인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어 조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직의 변화와 성장에 따라 자기 자신도 성장할 수 있을거란 희망을 갖고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거대 조직에 순응하고, 본인의 생각과는 다르게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마치 입대한 신병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입대 시에 마음 먹었던 결연한 의지들이 점점 약해지고, 시간이 빨리 흘러가 제대나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지겨워 하며 시계만 바라보듯이 말이다.
필자의 경우 첫 회사에 입사해 인사 관련한 업무를 배우고,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진행했었다. 그런데 교육 설계와 진행이라라는 것이 매 교육마다 다르고, 매번 새로울 것 같지만, 기본 Format과 Mechanism만 알면 단순 반복적인 일이 되고 만다. 강사를 섭외하는 일을 좀 더 Dynamic하게 해보고자 했지만, 국내에서 전문적으로 강의를 할 수 있는 강사들도 한정되어 있어 강사 Pool에 따라 교육 프로그램에 변화를 준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2년 정도 교육 업무를 하다 인사(HRM)로 업무를 변경했지만, 이 역시 2~3년 하니까 대부분의 업무를 Master하게 되어 대부분의 일들이 지루해지고, 재미 없어졌다.
그 이후로는 주어진 일들을 사무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했고, ‘직장 생활은 그저 돈벌이일 뿐, 내가 누리고 싶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지루하고, 재미없을 수밖에 없어’라고 스스로 현 상황을 정당화시키며 하루하루 시간 때우기(?)를 했다. 그런 직장생활이 벌써 19년차다. 중간중간 재미있는 일도 발생하고, 흥미있게 배울만한 업무에 투입되어 열정적으로 일을 하기도 했으며, 지루하고, 단순한 일들을 지속, 반복되게 하다 보니 요령과 Know-how가 생기기도 했다. 어쨌던 새로운 직무 수행 2~3년이 지나고, ‘이제 배울건 다 배워서 재미없다’고 느꼈던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성장해 있고, 단순 반복적인 일들도 이제는 3~4년차 직원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잘 해낼 수 있을 정도로 경력과 연륜이 쌓인 것같다.
필자가 취업준비생 시절 인사 업무를 지원하게 된 계기를 부끄럽지만, 조심스럽게 고백해 볼까 한다. 솔직히 말하면 드라마에서 보는 대기업 인사팀이 소위 말해 ‘있어 보이는, 힘 좀 꽤나 쓰는’ 일인 것같아 지원하게 됐었다. 뿐만 아니라, 입사지원하기 전 사법시험을 준비했었기 때문에 노동법, 민법 등을 공부했던 장점도 인사 직무에 활용할 수 있을 것같아 지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회사에 인사팀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고는 어떤 일을 했을까? 필자가 기대하기로는 인사팀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면 매일 회사 부서장급 인사들과 면담하고, 간부 직원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하는 일이 인사팀 신입사원이 해야 할 일이라 상상했었다. 직원들 중 부당하고, 부조리한 일을 당한 직원들을 도와주고, 인성에 문제 있다고 판단되는 직원들은 필자가 건의해서 징계를 하거나 한직으로 인사발령을 내는 일이 필자가 해야 할 일이라 상상했었다. 마치 회사의 경영자와 동일한 권한을 갖고, 어깨에 힘주어 내 맘대로 회사 인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 권력이라 착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인사팀 신입사원으로 회사에 입사해 보니, 보고서 한 장도 아이디어를 내서 창의적으로 작성할 수 없었고, 보고서에 들어가는 Wording 하나도 필자 마음대로 작성할 수 없었다. 직원에 대한 평가는 각 본부/팀의 리더들이 해주는 평가를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었으며, 조직개편/인사발령도 각 조직에서 건의해 주는 내용을 그대로 취합해 보고하는 대서(代書)가 인사팀 신입사원의 주(主) 역할이었다. ‘내가 남들이 만들어 준 문서 복사해서 보고 올리는 일이나 하려고 직장에 들어왔나?’, ‘나름 사회의 Elite라고 Pride가 있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게 명문대 졸업장이 전혀 필요 없는 복붙과 앵무새처럼 들은 말 그대로 옮기기라니’하고 자괴감에 빠진지 꽤 오랜 시간이었다. ‘내가 도대체 이렇게 높은 연봉을 받으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는거지?’
그렇게 괴로운 시기를 한 두 해 보내다 다음 단계로 돌입한게 글 초두에 말했던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등산과 여행을 좋아했던 필자는 9시부터 18시까지 회사에 노동력을 제공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필자가 좋아하는 등산과 여행에 몰두하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그게 말이 쉽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심지어 입사 초기에는 토요일 오전까지 매일 출근해 전혀 예측치도 못했던 단순 반복적인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상사에게 업무의 Quality가 떨어진다고 지적받고, 혼나며 눈치보면서 매일 8시간을 근무한다는건 지옥같은 직장에 감금된 사람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말이 좋아 하루 8시간이지, 당시는 노동법을 제대로 적용받지 못해 매일 최소 10시간 이상씩 근무했었다)
만약 인턴(Intern) 과정을 거치거나 인사 업무를 하는 선배에게 인사팀에 가면 어떤 일을 하는지 밑바닥부터 들었더라면 현실적으로 필자가 하고 싶고, 적성에 맞는 다른 일을 택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발을 들여놓고, Career를 쌓게 된 인사 직무를 근 20년 가까이 수행하며, 한 때는 인사 업무가 지겨워 다른 취미생활에 빠져보기도 했었고, 직무 경쟁력을 가질만한 Project에 투입되어 업무에 미친듯이 몰입하기도 했었으며,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이직도 불사해 다른 회사의 인사시스템을 공부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었다.
지금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 취업준비생들도 아마 필자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같다. 다만, 요즘에는 회사별로 인턴활동도 활발히 진행되고, 알바 자리도 많아서 직무와 관련된 경험을 충분히 겪어보고 회사에 입사하는 것이 가능해 지긴 했지만, 대부분 취업준비생들의 의견은 그래도 단기간 경험으로 직무를 선택하는 것은 어렵고, 그 직무가 자신의 역량, 적성에 부합하는지 여부 등을 파악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도 필자는 취업준비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점을 늘 강조한다. 관심 있는 직무의 인턴활동 기회가 있으면 되도록 여러 개의 인턴 활동들을 경험해 보고, 관심 있는 직무군에 종사하고 있는 선배가 있으면 실제로 회사에 출근해 매일매일 하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며 들어도 보고, 배워보라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성향이 다 다르고, 각자 개성과 특징이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기 위해 최대한 현실에 맞게 노력해 보되, 필자처럼 막연히 TV 드라마에 나오는 Image만 보고 직무를 선택하는 어리석은 짓은 피했으면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취업시장이 발달해 직무와 관련된 각종 정보가 난무하고, 서적, 동영상 등 많은 자료들을 손쉽게 구할 수는 있지만, 그 자료들이 상업적으로 제작된 자료들도 다수고,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어 무비판적으로,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그저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고, 그 중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들만 믿으면 될 것같다) 무엇보다 본인이 직접 일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 해당 직무를 경험해 보고, 스스로 선택해 직업 선택의 오류를 조금이라도 줄였으면 좋겠다.